스페인 왕세자와 레띠시아 오르띠스의 결혼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스페인이 새로운 장을 맞이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럽 왕실 역사상 최초로 이혼 경력이 있는 여성이 한 국가의 왕위 계승권자인 왕세자의 정식 부인이 되었으니, 이는 단순한 토픽감을 뛰어넘어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말이다.
과거 왕국이었거나 현재까지 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특히 스페인의 경우 왕가의 결혼은 오로지 왕족 간에만 이루어졌던 관습과 전통이 있었다.
이 관습은 1776년 까를로스 3세의 칙령에 의해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지난 5월 22일 치러진 이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스페인 역사상 처음으로 이 규범과 전통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신분이 다른 평민 출신과 연분을 맺어 결혼까지 하게 된 왕족들은 스스로 왕위계승권 포기를 천명하여 그 권리를 상실했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왕의 칙령에 의해서 왕세자 지위를 박탈당하거나 하였다.
순수한 혈통을 지키려고 왕족 간에만 이루어지던 수세기의 결혼관습이 무너진 것인데, 이미 1978년에 개정된 스페인 헌법부터 신분이 다른 계층과의 결혼에 대해 마지막 남았던 최소한의 제한 조항마저 사라진 바 있다.
스페인의 경우, 핸드볼 선수 출신으로 바스끄-까딸루냐계(바스끄 지방과 까딸루냐 지방은 공용어인 스페인어 이외에 각기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고, 분리독립 운동이 수차례 있었던 지역)인 이냐끼 우르단가린과 끄리스띠나 공주간에 이루어진 결합이 이 새로운 헌법의 정신을 구현한 전주곡이었다.
이러한 왕세자와 TV 여성 앵커와의 혼인이 성사됨으로 해서, 스페인에서는 물론 군주제가 더 확고하게 뿌리내린 여타 유럽 국가에서도, 그 전통적인 제도가 존속되는 데 큰 기여를 해온 하나의 마력이 깨어진 셈이다.
사실 그 동안 왕의 상징적 역할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내세운 왕가 혈통의 신성불가침 논리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왕가에 속한 왕족끼리의 결혼을 통해 국가간에 동맹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적 또는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정략적 목적이 숨어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뻬레스 쎄라노가 그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군주제는 권위, 영원히 살아있는 과거, 그리고 그 과거가 갖고 있는 어떤 신비함에 힘입어 존속해왔고,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늘 그 존재의 정당성을 누려왔다"는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어쩌면 이 새로운 신화는 과거의 전통에서 싹튼 것일지도 모른다.
왕세자가 중산층 출신으로서, 견실한 교육을 받고 자라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전문인이 된 레띠시아 오르띠스를 택함으로써 스페인 군주제는 확실히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되었다.
이 '사건'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받는 군주제의 위기를 알리는 서곡인지, 아니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맞게 유용한 역할을 하여 일반 국민들에게 공헌을 하는 제도로서 자리를 더욱 굳건히 잡는 계기가 될지를 스페인의 보통 국민들은 서로 물어보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랜 기간 까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가 그랬던 것처럼 왕세자 부부가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얼마만큼 얻느냐에 상당 부분 달려 있을 것이다.
왕세자가 결혼에 즈음하여 왕실의 역사와 미래를 생각했음을 믿을 만한 이유는 많이 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사적인 일은 물론 스페인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정치적, 제도적 면에 있어서도 판단을 더욱 더 엄격하게 해야만 할 것이다.
입헌 민주주의 역사가 이제 25년이 된 스페인 사회는 곧 까를로스 국왕의 군주제와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또 내부적으로도 각종 사회조직이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계속 발전해왔다.
따라서 스페인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가치는 새로운 왕실 가족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떤 장애물도 되지 않는다.
한 걸음 나아가 이 스페인 왕세자비는 성공한 전문인으로서의 자질, 지적인 능력과 인간적인 이미지로써 변화하는 이 현대 사회에 응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스페인 사회는 왕세자비 개인의 미래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그녀에게 비전과 위엄, 그리고 그녀가 대표하게 될 스페인이라고 하는 위대한 나라에 대한 의무감을 굳건히 지닐 것을 요구하고 있다.루이스 호다르 (UN산하 국제백신연구소 부소장)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대(약학박사) △일본 오사카대 및 나가사키대 Post-Doc(박사후) 과정 이수 △벨기에 소재 유럽의회 산하 백신 및 바이러스성 질병 퇴치팀 △WHO(국제보건기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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