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브를 하다보면 간혹 고즈넉한 풍경을 만난다.
해질녘 아담한 농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다.
해거름에 밤안개까지 살포시 끼어 그리 안온해 보일 수가 없다.
이리 저리 선이 그어진 들판과 멀리 담배 건조막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런 풍경만 보면 흑백영화가 생각난다.
색깔이 빠진 흑백톤의 풍광도 그렇지만, 편안한 정감이 흑백영화에서 나오는 느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흑백영화는 그렇게 사람을 편하게 한다.
어젠 흑백영화를 세 편이나 봤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를 보고, 케빈 스미스의 '점원들'을 보고, 내친 김에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까지 봤다.
원래는 흑백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케이블 TV에서 방영된 '7인의 사무라이'를 보고, 갑자기 흑백영화가 그리워졌다.
'7인의 사무라이'는 몇 번이나 본 영화였다.
그러나 불법 복제된 비디오테이프로 감상해서 제대로 맛을 못 느꼈는데, 이날 TV의 화질은 무척 또렷했다.
사무라이의 복장이며, 초췌한 농부들의 표정, 주름살, 다 헤진 옷 솔기 등이 화면에서 살아났다.
아키라 감독은 누구보다 흑백의 빛을 잘 이용한 감독이다.
'라쇼몽'에서도 그랬지만, '7인의 사무라이'는 얼굴의 그림자를 통해 사람의 심상을 표현하고, 숲 속에 쏟아지는 빛의 콘트라스트가 워낙 절묘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흑백영화 중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성난 황소'의 첫 장면은 일품이다.
한 권투선수의 인생역정을 그린 이 작품은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머리까지 가운을 뒤집어 쓴 로버트 드 니로가 혼자서 몸을 풀고 있다.
어깨를 숙이고 주먹을 내 지른다.
흐릿한 사각의 링, 관중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한 사나이의 고독한 삶의 투쟁이 흑백으로 잘 표현돼 가슴 찡하게 해준다.
특히 복서의 슬로 모션에 맞춰 흐르는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관객을 처연함의 극치로 몰아간다.
라즈니쉬는 '한쪽이 차면, 한쪽이 빈다'고 했다.
컬러영화는 화려함과 판타지는 강하지만 내면의 깊이는 약하다.
시각적 현란함이 마음의 흐름을 막기 때문이다.
눈의 만족은 결국 마음의 결여를 불러오는 것이다.
요즘은 컬러의 '뷔페시대'다.
TV의 화려한 쇼에 알록달록한 인터넷의 화면, 거리의 현란한 간판들…. 현기증이 날 정도다.
색깔의 뷔페가 느끼하다면, 흑백영화의 담백한 맛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다음주에는 낙엽과 여인의 도도함이 돋보이는 '제3의 사나이'를 볼까 보다.
filmt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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