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모랑마(Chomolangma : 珠穆朗瑪 해발 8,848m) 거의 한나절을 달려 왔지만 인기척조차 없는 마을 몇 개를 지났을 뿐, 표지판은커녕 길의 경계조차 애매하다.
길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차 안은 이미 폭격을 맞은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마흔세 살을 먹은 지프의 창문은 흙먼지를 막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모자를 눌러쓰고 수건으로 얼굴마저 가렸는데도 온통 먼지를 덮어쓴 여행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두더지 꼴이다.
초모랑마를 향해 가는 길은 이래저래 외롭고 힘이 든다.
초모랑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의 원래 이름이다.
비록 지금은 이 땅의 사람들처럼 "대지의 어머니" 라는 그 이름마저 빼앗겨 낯선 지명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늘로 오르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초모랑마는 인간이 해발 8,848m라는 그 높이를 가늠하기 전에도 이미 가장 높은 산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원래의 있던 높이를 겨우 재고서 기껏 한 일이라곤 "대지의 어머니"를 에베레스트로 바꾸어 놓은 어리석음뿐이니 말이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쉐가르(Shelker: 新定日 4,050m) 마을에 닿는다.
아이들이 화석을 들고와 차문을 두드린다.
화석은 가장 주요한 상품의 하나로 이곳이 한 때 깊은 바다였다는 증거다.
무릇 살아있는 것들의 보금자리였다가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치솟은 초모랑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지의 어머니"로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텅 비어 있는 2층의 방 한 구석에 짐을 풀고 주인이 숙소로 겸하고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자 이미 가이드 안씨와 운전기사 팅로는 주인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
상표가 눈에 익은 TV에서는 연속극이 한창이다.
가이드 안씨는 티베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라고 말한다.
식당 밖 창살에 매달려 넋을 잃고 TV에 빠져 있는 아이들과 귀고리에 머리를 땋은 티베트 전통적 복장을 한 식당 안 젊은이들에게 연속극의 주인공은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중국어로 외치고 있다.
고생 끝에 오는 낙이 어떤 것인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그들은 너무 진지하다
주인은 TV를 만든 나라에서 온 여행객에게 술을 권한다.
티베트의 술 마시는 풍습은 독특하다.
전통 술인 '창'은 야크의 젖을 발효시킨 것으로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맛을 지니고 있다.
보통 술을 권할 때는 세 번을 권하는데 첫잔을 따르면 하늘에 감사하며 반만 마시고 내려놓는다.
다시 잔을 가득 채우면 조상에게 감사하고 반을 마시고, 다시 잔을 가득 채우면 마지막은 한꺼번에 마시는데 이 때는 친구를 위해 건배하는 것이다.
각 잔의 의미가 달라 술잔을 마다하기가 쉽지 않아 이내 술기운에 취한다.
고대 인도철학에서는 사람을 '삶을 고행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삶을 여행으로 받아들이는 자'로 나눈다.
도대체 고행과 여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삶을 부정과 긍정으로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아둔함이 아닐까? 고행도 여행도 삶의 긴 여로를 가는 방법이고 비록 여행자일지라도 삶이 고행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닐까 싶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려다 창문을 열고 만다.
별빛 때문이다.
어린 날, 가슴에 가득 쓸어담던 별빛이 거기에 있다.
겨울 밤, 가난한 소년의 친구가 되어 아스라이 빛나던 별들과 모든 것이 절망으로 보이던 고교시절, 그저 차갑게만 빛나던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별들이 모여 노래하는 쉐가르 마을에서 여행자는 결국 잠들지 못한다.
오후가 되면 급변하는 기후로 초모랑마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다.
거대한 계곡을 따라 오르내리기를 한두 시간, 야크를 키우는 유목민의 텐트를 만난다.
매서운 바람에도 몇몇 남자들은 하늘을 보고 누웠다.
청명한 하늘, 은빛 설원, 별을 깔아놓은 밤하늘을 이고 자는 그들에게는 매서운 바람조차 그저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양을 안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수줍게 웃는 여인은 아마도 그들의 아내이리라.
티베트에서는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
다처일 경우의 여자들은 자매간이고, 다부일 경우의 남자들은 형제일 경우가 많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집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고 딸만 있을 때, 그 집에 들어간 양자는 장녀뿐만 아니라 나머지 딸들과도 혼인을 하게 된다.
또 야크나 양을 키우는 유목민의 경우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의 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일처다부제가 이루어진다.
형제 간에 아내를 하나 두는 것은 먹고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력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인의 이름은 혈연에 바탕을 둔 성씨의 개념은 전혀 없고 오로지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이름마저도 단순해 구별이 어려울 때는 이름 앞에다 특징을 곁들여 이름을 짓는다
이렇듯 씨족사회의 모계 풍습이 낳은 일처다부제나 일부다처제는 이방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어려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독특한 문화이다.
얼핏 설산의 봉우리들이 고개를 잠시 내미는가 싶더니 드디어 초모랑마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검은 갑옷을 두른 듯한 당당한 위용은 하늘로 오르는 길을 지키는 장수의 모습이다.
초모랑마는 소위 등로주의자들의 꿈이다.
산을 오르는 데에 있어서 등정과 등로는 그 이름처럼 어떻게 오를 것인가로 구분된다.
등정은 단순히 정상을 오르는데 의미를 두지만 등로는 어떤 길로 오를 것인가에 의미를 둔다.
네팔 쪽으로 오르는 길이 보다 평탄한 등정이라면 티베트 쪽은 눈조차 쌓이지 않는 수직의 벽으로 되어 있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등로주의자들의 도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행자에게는 등정도 등로도 '대지의 어머니' 초모랑마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에게는 거대한 자연 앞에 그저 얼마나 겸허한 마음이 있느냐가 있을 뿐이며 그 겸허함이 용기가 될 때 비로소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허락할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룽북 사원(Ronbuk 5,030m)도 자연과 신에 대한 인간의 겸허함에 다름 아니다.
룽북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푼다.
베이스 캠프까지는 8㎞가 남았지만 어차피 오르지 않을 것이라면 정상의 직벽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싶었다.
나무 의자를 끌어다 놓고 눈조차 쌓이지 않는 직벽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2004년 5월 계명대학교 산악부 소속 박무택과 장민이 꿈을 묻은 곳, 아니 눈보라에 길을 잃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산소통과 물을 짊어지고 백준호가 홀로 오른 그 직벽은 말이 없다.
신은 기억할까? 산에게 맡겨진 두 친구의 운명을 인간의 것으로 돌리려는 한 사내의 비장한 의지와 발걸음을. 신은 기억할까? 거대한 자연 앞에 너무나도 작은 인간이 보여준 위대한 의지와 용기를.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오랜 산 친구인 네게 이 유서를 남기마!/내 어머니를 만나다오/그리고 말해다오, 난 행복하게 죽어갔다고/난 어머니 곁에 있었기에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았다고/(중략)…/그리고 친구여 네게는 이 한마디를/내 피켈을 집어 달라고/피켈이 치욕으로 죽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어딘가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져가 다오/그리고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룬을 만들어 다오/그리고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다오
세 사람이 꿈을 묻은 그 마지막 직벽 앞에서 그 들의 영원한 꿈을 담은 듀프라의 '어느 날'이란 시를 바친다.
오후 3시, 초모랑마는 눈보라에 쌓여 보이지 않는다.
이제 티베트 여행을 정리할 시간이다.
희망을 잃고 유랑하는 사람들의 깊은 슬픔, 사람을 희망이라 가르치던 이념이 이 땅에 가하고 있는 폭력, 이런 것들이 이번 티베트 여행의 전부였다면 절망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것들을 보지 못했다면 더 불행했으리라. 늘 새벽을 깨우던 향 연기와 오체투지로 세상의 구원을 빌던 사람들의 노래가 있는 곳,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을 비웃듯 때로는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때로는 붉은 단층의 나신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막아서던 땅, 또 그 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연꽃 속에 핀 보석(옴마니 반메홈)처럼 자신을 억압하는 폭력 앞에 말없이 항거하고 있기에 더 아름답고 소중하다.사진: 에베레스트로 더 많이 알려진 초모랑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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