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시-김춘수 선생님 영전에/권기호

시 때문에 계신분

시가 있었기 때문에 오신 분

황량했던 선생님 일본 유학 시절

우연히 들른 고서점에서

한편의 시를 발견하고

아! 이 세상에는 시란 것이 있구나

감탄하시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시를 시로서 있게 하신 분

우리들 모두

하나의 꽃으로 있게 하시고

꽃의 황홀과 슬픔으로 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무엇보다

시를 다만 시로서 있게 하신 분

이데올로기 위에 시를 있게 하시고

역사 위에 시를 있게 하시고

이데올로기란

허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역사란 폭력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처용을 더욱 처용으로 살아있게 하시고

그러면서 마침내

언어에 절망하신 분

언어의 그 덧없음에 절망하면서

그 언어를 모두 부수어

모국어의 보석으로 다시 갈아내신분

그런 선생님께서

이제 한시대를 마감하고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우리에게 시란 무엇인가를

부단히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이 그리던 이 산하 두고

이제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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