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20여 년 전 가수 김수철이 불러 히트한 '젊은 그대'라는 곡이다. 최근에 어느 광고카피에 등장해 다시 멋을 부리기도 했다. 더부룩한 턱수염의 사나이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모양으로 보아서는 내일의 희망이 물려 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세상은 희망적이지 못했다. 죽는소리 일색이었다. 구멍가게나 식당이나 손님은 줄고 또 줄었다.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했지만 열어서 꺼낼게 없다면 어쩔텐가. 그래도 희망가를 불러야 할까. 도대체 희망이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란 말인가.
또 한 해 마감이 코앞이다. 세풍(世風)의 세상바람은 여지없이 불었건만 돌아온 답풍(答風)은 여전히 삭풍(朔風)이다. 옛글에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草上之風草必偃)"질 않았는가. 하물며 모진 겨울 찬바람에야. 그러면서 "누가 알랴, 바람 속에도 풀은 다시 일어섬을(誰知風中草復立)". 바로 이어지는 대구(對句). 아무리 매섭고 모진 겨울바람이라도 일어 설 풀은 이처럼 일어 선다질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풀의 저항과 풀의 의지가 한 뼘이라도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풀 초(草)보다도 못한….
일출이 장엄이라는 동해바다 호미곶에 상생의 손이 있다. 청동과 화강암의 재질이 육중하다. 육중하지만 그곳에는 생기를 불어넣는 조화가 있다. 웬만한 이들에게는 감히 거들떠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의 조화다. 왼 손은 뭍에서 오른 손은 바다에서 뭍바람과 바닷바람을 서로 주고받으며 상생의 바람을 만들고 있다. 그토록 부르짖었던 상생의 바람. 누구와의 상생이며 무엇을 위한 상생인가. 지린내 나는 세상에 상생이라니. 고리삭은 젊은이들이 상생을 들쳐업고 개혁을 한답시고 지릿내 나는 빨래감을 안고 있을 뿐이다. 물 맑은 강가로 나설 생각을 않는다. 왜? 군내가 이미 그들의 후각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어렵다고들 한다. 두터운 스웨터를 겹 입은 우리의 이웃들로부터는 매캐한 연탄내만 말없이 바람에 실려 온다. 비록 연탄가스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라고 김칫국 마시던 시절. 그 시절은 아니라 하더라도 '젊은 그대'들은 연탄을 무척 싫어한다. 그래 시인 안도현의 절규를 듣기라도 했는가. 그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정말이지 그대는 한 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가. 연탄불처럼, 이글 거리는 연탄불처럼 말이다.
이혼이 늘고, 금연 열풍을 비웃기라도 하듯 담배 소비가 늘고, 도처에 화나는 일 뿐이라서 그런가. 소주판매량은 갈수록 늘기만 했다. "나로써 비롯된 일이 너무 많았다"며 대통령 마저 해 넘기는 이 마당에 고백 같은 회한에 찬 한마디를 했다. 앞으로 남은 임기에 이 말의 파고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파고가 적어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쓰나미'의 재앙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왠지 떨칠 수가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었던 지금까지의 경험 탓이다. 함부로 뱉어버린 그 숱한 설화(舌禍)들이 바로 생생한 현장이질 않았는가.
교수들이 올 한해의 우리사회를 규정하는 사자성어로 '당동벌이(黨同伐異)'를 택한 것만 봐도 우리의 대립각이 얼마나 예사롭지 않기에 그랬을까. 안타깝다. 너 나 없이 패거리 지어 상대를 뭉개버리고 으깨버리는 세상. 여기에 남는 것은 불신과 원망과 자괴. '이합집산'에서 '우왕좌왕'으로 다시 '당동벌이'까지 왔으니 다음은 뭘까. 쌍심지를 켠 대립각 사이에 끼어 부대끼는 서민들이 바라는 내년의 사자성어는 뭘까. 다언혹중(多言或中). 그렇다. 그 숱하게 쏟아지는 말들, 거짓말들 가운데서 운 좋게도 혹 들어맞는 말 하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에서다.
말이 많다보면 실수로 인한 것일지라도 맞는 말 하나는 있다는 이런 사자성어를 기다리는 우리는 과연 희망이 있는 국민들인가. 그래서 희망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앞에서 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다려야 한다. '젊은 그대'들이 희망을 마시며 잠 깨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쯤 세풍의 세상바람은 삭풍에서명주처럼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으로 온통 채워질 것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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