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알려진 곳 숨은 이야기-구룡포 공원 비명없는 비석

항구 축조한 일인 '十河' 송덕비

과메기·대게·오징어로 유명한 어촌, 구룡포. 옛 구룡포수협 위판장을 따라 난 읍내 중심도로 동쪽 언덕배기에 있는 구룡포공원에 오르면 항구는 물론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공원 안에는 6·25전쟁때 숨진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충혼각과 어민들이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용왕님께 제사 지내는 용왕당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바다를 굽어보며 서 있는 비취색 비(碑) 하나. 받침돌을 제외하고도 대략 높이 7~8m, 너비 1.5~2m나 되는 꽤 큰 규모다.

하지만 규화목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석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지 아는 이는 구룡포에서도 드물다.

비 앞쪽에 새겨진 비명(碑名)을 시멘트로 덧칠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곳 출신으로 구룡포공원을 오랫동안 관리했던 고(故) 탁도중(2001년 82세로 사망)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비에는 '十河 彌三郞 頌德碑'(십하 미삼랑 송덕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즉 일본인 '十河 彌三郞'(도가와 야사브로)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송덕비라는 것.

그렇다면 '십하 미삼랑'은 누구이며 구룡포와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탁씨는 생전 기자와의 만남에서 "한일합방 이후 이 곳 구룡포에 정착한 도가와는 구룡포항을 축조한 장본인이었고 비석은 해방전인 1942년쯤 세웠다"며 "6·25 전쟁 이후 대한청년단원들이 반일감정때문에 시멘트로 비명을 칠해 버렸다"고 말했다.

탁옹의 증언에 따르면 도가와는 당시 구룡포 앞바다에 각종 해산물이 엄청나게 많이 났지만 배가 정박할 항만시설이 없자 총독부을 설득, 항만 축조 약속을 받았냈다.

도가와는 처음엔 인근 장기면 모포리에 항만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포항까지 수송로 확보가 어렵자 구룡포항을 선택했다고 한다.

1932년 1차로 방파제 150m가 완공됐고 얼마 뒤 350m가 추가 완공됐다.

도가와는 이후 해산물 수송로 확보를 위해 포항~구룡포간 도로도 닦았다.

당시만 해도 어항 축조와 도로 개설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형사업이어서 총독이 직접 공사 현장을 다녀가기도 했다.

항만과 도로가 완공되자 구룡포에는 국내는 물론 일본의 고기잡이 배들까지 모여들기 시작, 갑자기 동해안 굴지의 항구도시가 됐다.

지금도 구룡포공원 앞에 남아있는 일제시대 일본인 가옥들은 당시 구룡포의 영화를 쓸쓸히 말해주고 있다.

이 곳 출신인 배홍대(83)옹은 "이 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라며 "하지만 이제는 시멘트칠을 벗겨내 이 비에 얽힌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만큼 당초 모습을 되찾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향토사학자인 동해정보여고 황인 교사는 "역사적 유물을 시멘트로 칠해버린다고 해서 치욕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며 "진정한 극일(克日), 올바른 역사 인식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평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교사는 또 "비석의 주인공인 도가와는 물론 이곳에 살던 일본인 후손들이 가끔씩 이 곳 구룡포를 찾는 만큼 이들을 따뜻하게 맞을 수 있어야 한다"며 "도가와 송덕비와 남아있는 일본인 가옥 등은 오히려 훌륭한 관광자원"이라고 지적했다.

포항·임성남기자snlim@imaeil.com사진: 향토사학자인 황인 교사가 구룡포공원에 있는 일본인·도가와 야사브로(十河彌三郞)'의 공덕비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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