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봄날

'봄이 오면 두말할 것 없이 눈 앞이 훤해진다'고 김춘수 시인은 그의 글에서 봄을 '환함'의 이미지로 그려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새 햇빛부터가 달라졌다. 날씨는 여전히 변덕스럽지만 햇볕 바른 날엔 햇살이 한층 화사해지고 도타워 보인다. 시야가 툭 트이는 느낌이랄까.

봄이다. 겨우내 인적 뜸하던 운동장이나 수변공원 등지에도 힘차게 팔을 흔들며 걷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과수원의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에선 봄나물이 여린 고개를 내밀락 말락하고, 개나리 가지의 꽃눈도 나날이 볼록해진다. 겨울을 겪은 봄땅 어디에나 생기가 돈다.

배우 이은주가 죽은 뒤 많은 사람이 한동안 우울감을 떨치지 못했다. 화려해 보이던 유명 배우에게 우리와 다르지 않은, 어쩌면 더 무거운 삶의 고뇌가 있었다는 데서 연민도 느꼈다. '이승을 산다는 일이 나에게는 갈수록 눈물겨워진다'는 김 시인의 고백도 새삼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서울로 이사 간 지인이 오랜만에 전화를 해왔다. 근황을 묻는 인사 끝에 요즘도 수성못 주변을 걷느냐고 물었다. 가~끔이라는 대답에 그리움이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때가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몇 해전 초여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깔깔거리며 함께 수성못 둑을 두어 바퀴 돌았을 뿐인데 그것이 그녀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은 모양이다. 사실 행복이란 무심히 흐르는 일상의 조각들 속에 숨바꼭질하듯 숨어있지 않은가.

오래 전 국내서도 상영됐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의 이탈리아 개봉 제목은 '한 순간의 행복'이었다. 영화 속의 키팅 선생은 제자들의 틀에 박힌 사고를 깨뜨려 주느라 무진 애쓴다. 유명 평론가의 시각으로 시를 가르치는 대신 졸업생들이 재학 중 찍은 사진 앞에서 '시란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영화 제목은 그가 제자들에게 라틴어로 외친 "한 순간의 행복, 그걸 잡아야해"라는 말에서 따온 듯하다.

춥고 메마른 겨울 뒤에 따스한 봄이 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봄은 대자연이 보내오는 편짓글 같은 계절이다. 참고 참으면 화사한 날이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봄날, 정오의 햇빛처럼 반짝이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또 하나의 렌즈가 필요할 것 같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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