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 여행사 사무실에 잠깐 만난 김수정이란 분이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 왔다며 연락이 왔다. 어찌나 반가운지. 그녀는 지금 조카랑 여행 중이란다. 함께 만나 한동안 못하던 수다를 잔뜩 떨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모두들 하나같이 헬멧을 쓰고 자전거 선수 같은 옷차림으로 페달을 바삐 밟고 있었다.
모든 차가 자전거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방향을 수신호하고 자동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에게 길을 양보한다.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몹시도 부러운 풍경일게다.
간만에 하루의 여유를 즐긴 딸과 나는 해가 으슥해지자 노팅힐에 있는 포토벨로 마켓으로 향했다. 런던에는 캄덴마켓, 코벤트가든, 지금 가고 있는 포토벨로 마켓 등 대형시장이 몇군데 있다. 배우 휴 그랜트와 쥴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노팅힐'이란 영화의 첫 부분을 장식한 곳이 바로 포토벨로 마켓.
노팅힐의 포토벨로 로드 마켓(Portobello Road Market)은 약 2km나 되는 길을 따라 양쪽으로 가게와 노점들로 쭉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리는 '웨지우드' 같은 도자기 그릇들이 그냥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놀랍다. 대부분 쓰던 그릇이어서 가격도 싼 편이다. 마음 같아선 예쁜 장미꽃 무늬가 그려진 커피잔과 접시 몇개를 사고 싶은데 배낭 여행자의 무거운 어깨를 생각해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골동품 상품을 파는 주인이 너무 젊어도 안 어울릴 것 같아서일까. 가게 주인들은 대부분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다. 1837년부터 이곳에 앤티크 시장이 들어섰다는데 약 200년이 지난 지금은 2천개가 넘는 골동품 점포들로 시장통이 채워져 있다.
무엇부터 어떻게 보아야 할지…. 너무 볼거리가 많은 것도 때로는 여행자를 힘들게 한다. 짐이 되니 예쁜 그릇이나 인형들은 그림의 떡이고 액세서리 같은 것들은 혹시 바가지를 쓸까 그저 눈으로만 즐길 뿐이다. 어느 시장을 가든 길거리에 파는 음식 냄새는 발걸음을 잡게 마련. 바게트 빵에다 금방 튀겨낸 생선 커틀릿을 야채와 함께 넣고 겨자소스를 뿌린 샌드위치가 군침을 돌게 한다. 이 샌드위치에는 닭고기를 햄버거처럼 잘게 다져 두텁게 스테이크처럼 만들어 튀긴 것을 넣기도 하고 닭고기 자체를 조각으로 튀겨 넣기도 한다. 길거리에 서서 입가에 겨자소스를 묻혀가며 우걱우걱 먹는 다른 여행자들의 모습을 보니 우리 모습도 저러려니 싶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장을 둘러보다 고기를 노점에서도 파는 광경을 심심찮게 보인다. 무척 색다르다. 우리나라 같으면 돼지고기, 소고기를 길가 노점에서 산다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여기선 각종 고기를 부위별로 잘라 랩으로 포장한 다음 가격표를 정확히 붙여 판다. 가게 주인은 꼭 흰 가운을 입고 있는데 그렇게 깔끔해 보이지는 않아도 믿음은 간다.
런던 사람들은 과일과 고기를 무척 즐긴다. 다른 것에 비해 과일과 고기가 싼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사과는 우리나라의 부사와는 많이 다르다. 맛을 슬쩍 보니 단맛도 그리 나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는 유기농 재배가 대부분이라 그냥 씻어서 껍질째 먹는다고 한다. 시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좀 전에 찜해둔 목도리 가게에 들렀다. 갑자기 추워진 런던 날씨 탓에 뭔가 따뜻한게 필요해서다. 눈발이 날리기까지 하니 옷을 꾸역꾸역 입었는데도 추위에 재간이 없다. 25파운드짜리 머풀러가 눈에 띄었다. "지금 20파운드 밖에 없어요"라며 생떼를 쓰자 주인 할아버지가 잠깐 머뭇하다 오케이 사인을 한다. 우하하! 5파운드(1만원 상당)나 깎다니. 내가 영어로 흥정을 하고 거기다 깎기까지 했으니 스스로 무척 대견스럽다.
다음 행선지는 캄덴마켓. 히피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시장이란다. 노팅힐이 골동품이 중심이라면 이곳은 주로 패션이 위주가 된다.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희귀한 패션들이 즐비하다. 우연찮게 이곳 길거리에서 카레, 자장을 파는 한국인을 만났다. 경상도 억양이 강해 고향을 물어보니 경주란다. 무척 반가운 듯 덤으로 닭꼬지를 덥썩 준다. 물가가 비싼 런던 생활이 고단하기도 하겠지만 먼 이국땅에서 밝게 웃으며 장사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인다. "한국도 요즘 경기가 어렵다면서요?"라며 이것저것 한국에 대해 물어본다. 이국땅에 있어도 마음은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쉬운 작별. 살을 파고 드는 매서운 바람에 몸은 움츠러들지만 가슴 한구석엔 따뜻한 무언가가 몽실몽실 피워나고 있었다.
글·사진 도현주(주부·논술강사)
사진: 1. 포토벨로 마켓 시장 내부의 모습. 쭉 늘어선 골동품 가게 사이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행인들로 붐빈다. 2. 명품 웨지우드 그릇이 여기 런던에선 바구니에 담겨 판매되고 있다. 3. 캄덴마켓 안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교포 권옥경씨. 경주가 고향이라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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