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옮긴 딸애는 한달 정도 서울 말씨를 배워 거의 완벽하게 서울내기로 섞였다. 그러다 아직 1학기가 가기 전 어느 날 점심식사 후 밀려 온 졸음 때문에 촌뜨기임이 들통나고 말았다. 무심코 "아 잠이 와"라고 한 때문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잠이 올 때 "졸려"라고 하지 "잠이 와"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탓이었다. 사전에 나오는 표준말과 억양 위주의 연습을 그 정도만으로는 서울 출신으로의 위장이 역부족이었다. 대신 생활 속 숨어 있는 말 한 마디에 오랜 전통이 녹아 있음을 알게 했다.
◇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가장 재미있는 경상도 말로 꼽는 '가가 가가'는 그들에게는 흉내내기 어려운 말이다. 길고 짧은 발음과 억양이 받쳐주어야 말의 생명이 살기 때문이다. 어학적으로도 세계에서 희귀한 '가가 가가'가 아니라도 경상도 사투리 하나하나의 고저장단을 맞추려면 서울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 전라도 말로는 '거시기'가 압권이다. 물론 거시기는 엄연히 표준말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즐겨 쓰다보니 아예 전라도 사투리로 알 정도다. 말하다 막혀도 거시기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도 거시기다. 때와 장소도 거시기로 표현이 되고 감정 표현에는 거시기 만한 말이 없다. 사랑도 미움도, 놀람도 민망함도 거시기 하나로 표현한다. 아예 거시기와 토씨만으로 한 문장을 이룬다. 그래도 듣는 이나 말하는 이 누구나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다.
◇ 14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거시기'가 본회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열린우리당 안영근 의원이 대통령 선거자금 때문에 철창 신세를 지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사면을 제기하며 거시기를 꺼냈다.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김승규 법무장관의 대답에 "법무부장관께서 건의하면 좀 거시기한지"라고 묻는 대목에서 폭소가 터졌다. 장관도 "거시기에 대해 잘 생각해 보겠다"고 화답했다.
◇ 전국적으로 표준말 쓰기가 대세다. 그러나 '가가 가가' 나 '거시기'외에도 이쁘고 은근한 사투리는 다 헤아릴 수 없다. 다양하기도 한 데다 말 하나하나가 제각각 지역을 대표한다. 말의 세계에서는 지방화가 더욱 아름답고 활기차다. 향수의 세계로 사라져가는 사투리를 살리는 일도 지방 분권의 한 대목이 아닐까.
서영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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