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방극장 지각변동 '주말의 명화' 사라지나

인터넷·케이블 TV에 밀려 찬밥신세

"주말의 명화가 뭐예요?"

아직도 3040세대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주말의 명화. 주말 심야시간, TV 브라운관 앞에서 식구들끼리 오순도순 모여앉아 즐기는 주말의 명화는 극장 갈 엄두를 못 내던 이들에게는 '안방극장'의 대명사였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나오는 '신프로'를 보려면 예약까지 해두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이런 안방극장의 모습이 최근 1, 2년 사이 먼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시청률 40~50%를 넘나드는 일부 인기드라마를 제외하고 TV가 안방극장으로서의 흡인력을 크게 위협받고 있다. 24시간 영화를 보여주는 케이블 TV가 주말의 명화를 밀쳐낸 데다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불법 공유'가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상파 시청률은 매년 급감하고 있으며 비디오 대여점도 고사직전이다.

◇아직도 TV로 영화보는 사람 있어요?

4년째 지역 IT업체에 근무하는 최준형(31·경북 구미)씨는 TV에서 영화를 본 지가 까마득하다. 자칭 영화마니아인 최씨의 200M 노트북에는 '스타워즈 에피소드3', '미스터&미세스 스미스', '사하라'등 최근 개봉한 영화 10여 편이 들어있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6천 원씩 내고 극장에 가본 지도 1년이 넘었다. "P2P(개인간 정보공유 사이트)에 가입하면 각종 영화를 입맛대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지상파에서 보내주는 영화래야 철 지난 것 들 뿐이고 노트북을 TV 브라운관에 연결하면 얼마든지 큰 화면에서 볼 수 있는데 비디오 대여점 갈 일도 없죠.'

회사원 김정훈(40·동구 효목동)씨가 20년째 내세우는 취미인 영화감상. 그런 김씨의 영화보는 습관이 최근 달라졌다. 신문을 펴 들면 방송 시간표를 보는 대신 케이블 TV편성표를 잘 간수해둔다.

"월 1만 원 정도만 내면 하루종일 영화를 보여주는 케이블 TV가 있는데 굳이 TV를 찾을 필요는 없죠. 드라마, 뉴스, 영화, 홈쇼핑 등 다양한 정보가 24시간 쏟아지는 케이블이 있잖아요."김씨는 케이블 TV 없는 집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안방극장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그동안 유일한 화상 정보전달 수단으로 안방을 차지했던 TV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케이블 TV, P2P 등의 강력한 도전에 부딪혀 자리를 내 주고 있는 것이다.달라진 안방극장의 위상은 지상파 방송의 고전에서 쉽게 실감 할 수 있다.

지난 5월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발표한 '2004년도 시청률 백서'에 따르면 지상파TV 평일 시청률은 지난 2000년 36.5%를 기록한 뒤 감소세를 면치 못하다 지난해는 급기야 20%대로 떨어졌다. 진흥원 관계자는 "TV가 각종 영상매체들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표현했다. 그나마 '브라운관 파워'를 지탱해주던 10대 청소년들도 몇몇 개그 프로그램이나 인기 드라마를 볼 때만 TV를 켤 뿐 TV보다 재미있는 인터넷을 '로그인'하는데 더 열중이라는 것.

꾸준한 성장세를 거듭한 케이블 TV는 시장의 강자로 떠오른 지 오래다. 국내에 케이블 TV가 첫 등장한 것은 지난 1995년. 사업 초기에는 가입자 수가 늘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2000년대 들어 방송망 운영 업체(SO)들이 서비스 요금을 낮추자 제자리를 찾으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전국에 1천290만 가구가 가입, 지상파 가시청 가구의 74%를 차지하는 등 가입자 수가 급증했다. 안방극장의 판도를 바꾼 영화채널을 비롯해 어린이 시청 시간대(오후 4~7시)를 점령한 투니버스, 음악방송, 홈쇼핑 채널은 이미 TV를 앞질렀다. 세계 최초의 게임 전문 방송인 온게임넷의 성공은 지상파 TV의 게임방송 개국으로 이어졌다.

특히 P2P는 지상파 TV에 '강펀치'를 날렸다.영화, 드라마에서부터 해외 애니메이션, 교양프로, 학원강좌에 이르기까지 이용자의 구색에 맞춘 다양한 콘텐츠들이 매 시간마다 다운로드 받아 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업계에 따르면 요즘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90%가 개봉 전 이미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400만 명이 P2P사이트로 받아 본 것으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다.

P2P마니아 전수철(29·달서구 상인동)씨는 "예전에는 영화 한 편 다운받는데 하루 종일 걸렸지만 요즘에는 3, 4시간이면 충분하다"며 "대용량 외장형 메모리까지 나오면서 노트북 한 권에 100여 편이 넘는 영화를 담아두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안방극장 쇠퇴의 그늘, 문 닫는 비디오 대여점

안방극장의 몰락은 곧 바로 비디오 대여점의 쇠락으로 이어지고 있다.이미현(36·여·동구 신암동)씨는 지난 해 초 부업삼아 은행대출까지 얻어 비디오 대여점을 열었지만 지금은 후회막급이다. "비디오 대여만으로는 장사가 안돼 잉크 충전, 사진 현상주문까지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나마 손님이 몰리던 연휴때도 장사가 거의 안돼요. 고작 주말 저녁에나 몇몇 단골 손님들이 찾을 뿐이에요."

부업으로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한 지 3년째인 김정숙(40·여·수성구 수성동)씨도 사상초유의 불경기를 실감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최신프로가 나와도 많아야 2개 정도만 들여놔요. 비디오보다 만화책, 소설책 대여 수입이 더 나을 정도니 말 다한 것 아닌가요." 김씨 가게의 경우 비디오 대여 수입은 전체 수입의 30%에 불과하다는 것.

전국적인 체인망을 가진 비디오대여점 프랜차이즈 기업들도 속앓이를 하긴 마찬가지다. (사)한국영상음반유통협회에 따르면 현재 대구·경북 지역의 비디오대여점은 700여 개로 지난해보다 300여 개나 줄었다.

전국에 500여 개의 체인점을 둔 '영화마을' 허형식 홍보팀 과장은 "요즘은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자마자 비디오로 출시되고 있다"며 "그런데도 비디오 출시 1, 2주만 지나도 퇴물취급을 받아 진열장에서 밀려나기 일쑤"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사정이 이쯤되자 비디오 대여점은 식품·잡화류를 함께 파는 '숍인숍(Shop in shop)'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비디오를 팔기 위해 편의점처럼 가게를 꾸미는 고육지책인 셈. 잉크 충전소나 복권방, 만화 대여점을 겸한 가게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영상음반유통협회 이종수 회장은 "영화의 불법 다운로드와 케이블 TV가 비디오 대여점의 불황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90년대 초 비디오대여업이 호황이던 시절에는 전국 3만 개에 이르던 대여점이 현재는 6천여 개로 줄었습니다. 정부차원에서 불법 영화 다운로드를 막고, 케이블TV도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된 뒤 어느 정도 유예(홀드백)기간을 두고 방영하도록 해 줘야죠."

채정민기자 cwolf@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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