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에는 아사코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 등장한다. 그의 인생에서 딱 세 번 마주친 여성이다. 피 선생이 도쿄 유학 시절 유숙하게 된 집에서 처음 만난 아사코는 귀여운 소학교 학생이었다. 10여 년 후 도쿄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청순하고 세련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다시 10여 년 후 재회했을 때 아사코는 아직 젊은 나이에 인생을 다 살아버린듯 시들어가는 백합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 선생은 청순했던 아사코의 이미지만을 간직하면서 세번 째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 살다보면 만나야 할 인연도 있고, 만나지 말아야 할 인연도 있지만 어느 것이나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이다. 가장 안타까운 인연은 꼭 만나고 싶은데 만나지 못한 인연일 것이다. 지난 16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씨의 별세 소식이 우리에게 아련한 슬픔을 안겨주는 가운데 이씨와 그의 전 부인 줄리아 여사의 비련이 새삼 회자되고 있다.
◇ 1958년 미국 뉴욕에서 둘 다 건축가로 활동하다 사랑에 빠져 결혼했던 두 사람. 창덕궁 낙선재에서 비둘기처럼 다정하게 살던 그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종친들로부터 이혼 압력을 받았고 결국 결혼 24년만에 억지 이혼을 하게 됐다. 이씨가 일본으로 간 뒤에도 한국에 남아 있던여 사는 건강 때문에 10년 전부터는 하와이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삶을 담는 영화 제작 문제로 최근 서울에 체류하던 중 이씨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된 것.
◇ 그녀는 지금 슬픔을 못이겨 몸져 누울 지경이라 한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40년 동안 남편의 사진을 간직해 올 만큼 이씨에 대한 사랑이 깊다. 죽기 전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연락처를 몰라 애만 태워 왔다. 그녀는 언젠가 남편을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당신 (나와 헤어진)그동안 행복했나요? 안 행복했나요?"
◇ 조선 왕조의 마지막 적통으로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황세손. 그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만날 수 없었던 비운의 황실 며느리.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다룬 영화가 내년부터 제작에 들어간다고 한다. 줄리아 여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장례식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20여 년 간 헤어져 있었던 두 사람이 애달픈 인연으로나마 다시 만나게 되기를 빈다 .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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