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어준 칼럼]꼬추 무단 TV출연 사건에 부쳐

1.

난리다. 건국 이래 최초로 꼬추 두 개가 TV에 나와서. 그러고 보니 꽤 출세한 꼬추들이다. 이들의 지상파 데뷔를 전격 연출한 두 양반, 대체 어쩌자고 걔들을 맨 얼굴로 출연시켰느냐 심히 족쳐짐 당한다. 한없이 쪼그라든 그들의 최후 멘트, "물의를 일으켜 국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죄송, 좋다. 우리 또 죄송하면 쿠데타도 막 잊어주는 사람들이다. 근데, 뭐가, 죄송한 걸까.

2.

고작 "생방송인 줄 몰랐다" 정도의 사전모의면 알리바이 성립될 줄 알았던 그들에게 "음악적 다양성 말살하는 천박한 상업주의에 큰 엿을 자시게 하고 싶었소…"는 무리였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애꿎은 "자연보호!"라도 힘차게 외쳐줬음 이렇게까지 망연하진 않았을 게다. 정 안되겠거든 "땀 차서 속옷은 입지 않았다"는 변이라도 기필코 사수해 남성빤스의 통풍문제가 초래하는 반사회적 행동장애에 대한 경각심이라도, 업계에 남겼어야 했다. 진짜 죄송할 건 그거다. 그 정도 지르면서 아무런 맥락도 없었다는 거. 내가 다 죄송할라 그런다.

3.

그러나 죄는 노출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노출로만 말하자면, 문화현장에서의 누드 이제 거리가 못 된다. 남녀 모두 '성기 노출'한 오페라, 예술의 전당에서 한다. '성기 노출'한 현대무용, 수두룩하다. 펑크는 '성기 노출'이고 오페라는 '전라 공연'이라 사기 치지 말자. 꼬추는 꼬추다. 그들의 진짜 죄목은, 동의를 구하지 않은 불특정한 공공을 상대로 했다는 데 있다. 맥락에 동의한 '관객'이라면 펑크건 오페라건 상관없다. 사전인지 되고 보편합의 된 나라에선 TV서도 '성기 노출' 한다. 그러니까 그 행위가 가지는 폭력성의 본질은 노출이 아니라, 거부할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는 데 있다.

4.

사실은 사건보단 반응이 더 재밌다. 우선 가수들, 혹여 도매급 될까, 인정사정없다. 이미 명백히 작살난 꼬추 오너들에 대한 공격보단, 이번 경우는 비록 턱없었지만 인디가 때론 주류는 이해 못할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며 그게 다양성을 배양하는 그들의 존재의의기도 하다는 변호가 훨씬 절실한 상황인데 말이다. 야박하거나 내 코가 석자거나.

언론들은 신났다. "악마적 펑크족"이고 "밤의 광기"가 지배하는 홍대란다. "TV 켜기 겁난다"는 호들갑도 떤다. 거짓말도 참 잘한다. 겁 하나도 안 나면서. 여론의 두 발짝 뒤를 추수하며, 써야 할 것이 아니라 써서 안전한 것만 쓴다. 문화적 일탈은 산술평균의 무미한 문명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가 그 경계까지 관용해야 할 덕목이고 예술은 그런 비용으로 확장되어 왔다고. 노출이 아니라 맥락 없음이 문제고 TV라 안 되는 게 아니라 동의를 구하지 않아 안 되는 거라고. 그러니 꼬추 이슈라고 자동으로 음란이나 퇴폐의 도덕률로만 바라보는 건 아무 데서나 꼬추 까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인 거라고. 그리 말하는 언론 없다. 직무유기며 비겁하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블랙리스트와 퇴폐공연 단속을 언급하시는 서울시장님. 웬만한 건 다 건설로 해결하시는 분이니 퇴폐가수들에게 건전의식 함양을 위한 건설노역 명하실지 모를 일이다. 만에 하나, 샤워 시 자신의 하반신만 목격해도 잠시 혼절하고 마는 슬픈 불치병이 있으셔서 그러신 거람 많이 죄송하고. 이 파트는 코믹하다.

5.

문화를 건전과 퇴폐로 구분하겠다는 발상, 촌스러운 개념 된 지 오래다. TV에 무단 출연한 꼬추 두 개로 어찌 될 대한민국 아닌 지도 오래 됐고. 그리고 이제 좀 덜 비장해져도 우주평화 아무 이상 없게 된 지는 아주 오래 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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