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미화가 만난 사람] 안동 저전민요 복원 정은하씨

"한해에 갑작스레 전수자, 이수자가 다 돌아가시면서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던 안동 서후동 저전 민요를 복원하게 되었으니 다행이죠."

올해로 지천명, 열여덟부터 민요를 배운 민요연구가 정은하씨가 최근 경북도 무형문화재 2호인 안동 저전 민요를 되살려냈다. 이 민요가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에 제출했던 녹음 테이프와 현지 채록 등을 종합하여 재구성해낸 소리가 저전민요의 원형이라고 문화재관계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저전리 뿐만 아니라 영남지방 시골 구석구석을 다 다녀보니, 비닐하우스가 들어서고 경운기나 트렉터로 일을 하면서 모심던 소리, 모찌던 소리는 다 맥이 끊어져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챙기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 소리를 잃어버릴 지 모릅니다."

원래 정씨는 경기민요를 했다. 명창 안비취 선생의 마지막 제자(57호)인 정씨는 서울 경기민요를 배우면서 경상도에도 여러 가지 노동요가 있는 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경기민요를 택했던 터라, 경쾌한 서울 경기 소리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스승이 "너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으니 고향에 내려가서 고향의 소리를 하도록 해라."고 당부했다. 경상도 말투에 경상도 정서까지 온몸에 배어있는 보리문둥이 그녀에게 고향의 소리가 다가온 것이다. 그로부터 30여년, 경북도내를 샅샅이 훑으면서 소리를 채집했다.

"경상도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이 살아서 소리가 제일 많습니다. 대구권만 해도 팔공산 나물캐는 소리, 반야월 나락소리 등이 있고, 구미 발검들노래, 예천 통명농요, 상주 모심기노래, 안동 베짜는 소리, 하빈 들소리 등이 있습니다."

골골이 숨어있는 경상도 소리를 캐내기 위해 녹음기를 들고 다니던 정씨는 어느날, 안동 봉정사 아랫동네인 저전리 일대 모시밭에 농사일의 피로를 덜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던 노동요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이미 경북도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터라, 아직 지정되지 않은 소리부터 채집하고 있었는데, 저전리 사람들이 정씨의 민요교실로 들이닥쳤다.

"저전민요를 가르치고 보급해야할 전수자, 이수자가 한꺼번에 타계해버려, 민요를 잃게될 처지에 놓였으니 도와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안동시에서도 소리의 맥을 잇도록 해달라고 당부해왔다.

정씨는 저전리 민요 전수조교가 들고온 테이프와 현지에서 채록한 노동요를 합쳐서 원래 가락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저전리 민요는 보리타작에서 시작해서 모찌기 소리, 모심기 소리, 파래(물푸레)소리로 이어졌다.

"동해 바다에 씨를 뿌려..."로 열어가는 저전리 모내기 노래는 다른 지방의 민요처럼 간드러진 맛은 없어도 꿋꿋한 경상도 기상이 느껴지는 일노래였다. 지난 3월부터 찾기 시작한 저전민요의 원형은 꼬박 석달보름에 걸친 강행군 끝에 어느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안동 사투리도 많고 그냥 이해가 안되는 어려운 말들이 많았습니다. 음반만 듣고는 도저히 안되어서, 가사를 받아적고 현지에서 다시 불러보고, 베틀에 앉아서 일해가며 노래불러보고, 여러 가지 검증절차를 밟았습니다."

다행히 문화재위원들이 저전민요가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가락이 살아났다고 인정해주었다. 이렇게 하나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다보니 정씨는 쌓아놓은 부도 없고, 홀몸에 노후를 위한 대책도 해놓지 않았다. 조금 버는대로 민요발굴을 위해 쓰고, 영남민요의 맥을 잇기위한 교육에 투자했다.

정씨는 피란시절 대구문화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흔적만 남은 향촌동 낡은 건물 3층에 세를 얻어 산다. 취재를 하느라 살림집을 겸한 민요연구실에 앉아있으니 옥상에 터를 잡은 구두공이 돌리는 재봉틀 소리가 건물을 덜덜 울린다.

"그냥 제가 일할 때나, 일반 수업시간에는 참고 견딘다지만, 방송사에서 취재를 하러나왔을 때나 교육생들이 녹음을 하여가려고 할 때는 민망하지만 어쩌겠어요, 함께 살아야지요."

정씨에게는 사라져가는 영남민요를 붙들어놓겠다는 집념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지천명이 되도록 민요와 함께 살며 경북도내 각 대학에 민요관련학과를 만들었고, 숱한 제자까지 배출했거만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서 한푼도 쓴적이 없다.

채식을 하며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다스리는 그는 영남지방 골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민요를 채집하러 가거나 현지에서 전문가의 고증을 받을 때는 그 동네에 잔치도 열고 아낌없이 쓴다. 그렇게 20여년을 걸어왔기에 적지않은 영남 민요들이 멸실위기를 벗고, 영원히 보존될 수 있게 됐다.

글 최미화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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