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전! Travel라이프]배낭여행-(32)동남아 미술 산책

방콕 국립미술관 한국영화 설치작품 눈길

잇따른 비행기 사고와 동남아 여행객의 콜레라균 검출…. 동남아로 떠나기 전 이런 신문 기사들은 초행길인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그래도 해외 취재를 명목으로 공짜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어디 내 인생에 다시 있을 만한 행운인가. 혼자 다독거리며 담담해져 보기로 했다.

7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방콕 공황. 동남아 중심 공항답게 깨끗하고 커다란 면세점들이 나의 시선을 자극한다. 두려움과 불안감, 막막함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감정들이 방콕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보는 순간 설렘으로 바뀐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여행자들의 휴식처인 카오산 거리로 가서 숙소를 정하는 일. 공항을 나오기 전에 친절하게 생긴 한국인 3명과 동행을 하며 무사히 카오산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방콕의 대표적인 배낭여행자들의 고장답게 곳곳마다 즐비한 카페들은 밤늦도록 흥청대고 있었다. 숙소를 정하기 전 카오산 거리를 잠깐 둘러보고 정보를 얻기 쉬운 한국인 업소(밤늦게는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다) 옆에 미니 호텔 방을 잡았다. 쾌적한 느낌은 아니지만 피곤과 긴장으로 녹초가 된 내가 눈을 붙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다음날 공항에서 만난 언니, 오빠와 함께 태국에 와서 반드시 둘러본다는 에메랄드 사원을 향한다. 사실 왕궁 주변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 더 관심이 쏠렸지만. 다섯이서 택시를 타고 강렬하게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10분쯤 갔을까. 잔디로 덮인 넓은 광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천원, 천원!"이라 외치는 치열한 장사꾼들을 피해 왕궁에 들어서니 반바지차림으로는 출입이 안 된다고 하네. 여행 첫날부터 일이 꼬인다. 인근에 여권을 맡기고 긴 옷을 빌려야만 했다.

푹푹 찌는 더위와 높은 습도에 긴 티셔츠와 긴 바지라. 뭔가 어색하면서도 왠지 신성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금박으로 장식된 여러 개의 탑들과 이국적인 수호신 조각들은 환상적이다. 하지만 비싼 입장료에 비해 보수나 일반인 출입 금지라는 곳이 많아 아쉬움을 남긴다. 뜨거운 햇살 아래 잠깐의 여정을 멈추고 사원 지붕 아래 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우리나라 처마 끝에 걸린 풍경과 비슷하게 생긴 유리 조각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람에 찰랑거린다.

고단한 여정 탓인지 국립 미술관만 남겨두고 다들 지쳐버렸다. 미술관은 꼭 가야한다는 생각에 일행들과 헤어지고 혼자서 바글거리는 태국인들 사이를 열심히 걸었다. 30분쯤 걸었을까.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에 이르렀다. 평소 지도를 돌같이 알던 내가 혼자서 지도 하나만 믿고 찾아온 것이 무척 기특한 생각이 든다. 가이드북에는 입장료 30B(750원 상당)라고 적혀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매표소에 표 파는 사람이 없다. '뒷문으로 왔나?' 먼저 온 서양 사람들 몇몇이 열심히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뿐이다. 1층에는 왕궁 주변의 풍경화와 현대적의 느낌의 조각들이, 2층에는 지금의 왕인 푸미폰 국왕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큰 갤러리라기보다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아기자기한 갤러리다. 조명 시설도 이 정도면 합격점.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냉방시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 이렇게 찌는 나라에서 냉방시설이 없다니.

여러 개의 방을 왔다갔다하다 보니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막을 수가 없다. 2층의 푸미폰 국왕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예술적인 주제보다는 정치적인 맛이 흥건히 풍긴다. 지하에는 나의 구미를 당기는 현대 미술과 설치 작품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큐레이터라기보다 작품 지킴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예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가장 친절해 보이는 학생에게 작품 설명을 부탁하니 영어를 모른다네. 어쩔 수 없이 혼자 열심히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모두 개성 넘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지만 한국 영화들로 설치 작업을 한 작품이 유독 눈에 띈다. '흐흐흐, 태국도 한류열풍을 비켜갈 수 없군.'

정신없이 보다 보니 배에서 신호가 울린다. 미술관 밖으로 나오다 보니 역시나 표 파는 사람이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그 30B는 무엇일까. 다시 지도를 열심히 보면서 카오산 거리로 발길을 옮긴다. 짙은 매연과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방콕에서의 하루는 저물어간다.

안주희(경북대 미술학과 3학년)

사진: 1. 사원을 떠받치고 있는 수호신의 모습 2. 방콕에서 만난 첫 인연. 한국 여행객 3명과 방콕에서의 첫날을 보냈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3. 금으로 덮혀진 에메랄드 사원의 화려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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