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통령의 책 읽기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을 지나면서 문득 1년 전 어느 책 이야기가 기억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경향잡지'는 월간잡지다. 1906년에 발행됐다니까 내년이면 창간 100주년이 된다. 출판처가 가톨릭 교계라 얼핏 종교서적 같지만 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야기나 사랑과 평화의 깨침을 담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작년 이맘때 그 경향잡지사에서 전국 성당을 돌며 독자 확장을 위한 '잡지 보내기 캠페인'을 벌였었다. 필자도 누군가에게 한 권을 보내줘야 할 사정이 생겨 1년치 구독료를 대신 내고 책 받아 볼 사람을 골라야 했다. 누구에게 보내줘야 책 선물한 보람이 있을까 하다가 이왕이면 가톨릭 선교 내용도 담긴 잡지니까 가톨릭 신자인 노무현 대통령께 보내드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신청서에 청와대 주소를 적어냈다.

그리고 꼭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통령께서 필자가 보낸 '경향잡지'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평소 노 대통령이 링컨에 관한 책도 쓰고, 충무공이나 세종대왕 관련 책을 읽은 뒤에 청와대 홈페이지에다 독후감도 써내는 등 독서열이 높다고 홍보하고 있는 만큼 100년 역사를 가진 그 잡지도 읽으셨거니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책을 보내드린 뜻 속엔 마음을 열어주는 글이 많은 좋은 잡지를 일년쯤 읽다 보면 뭔가 조금이라도 내가 다스리는 마음이 좋은 쪽으로 변화되리란 기대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데 그런 희망적인 짐작이나 기대가 10'26 재선거 직후 책 보낸 쪽이 헛물만 켠 게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 더 짙게 남는다. 우선 청와대 비서실이 그쪽 홈페이지에 홍보한 '세종대왕을 다시 읽은 대통령의 생각 한 자락'이란 독후감 얘기만 해도 독후감 따로 행동 따로 같은 느낌을 준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실린 세종대왕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보자.

"세종은 전 기간에 걸쳐 인재를 발굴하고 문명 국가를 만드는 데 조선의 모든 인재를 활용했다." "또한 모든 사람과 사상에 대해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발휘했다. 훈민정음 반대론자에 대해서도 반박은 하면서도 관용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세종의 헌신적 통치에 의해 조선 500년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 모습인가. '조선의 모든 인재 발굴'과 '코드 인사' 비판. '모든 사람과 사상에 대한 관용'포용의 정신'과 '과거사 다시 캐내기' '헌신적 통치에 의한 경제적 풍요'와 '못해 먹겠다는 통치 자세에 의한 경제적 비풍요'. 책 따로 민생 정치 따로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링컨 책을 썼을 때도 "강력한 지도력은 강권적 지도력이 아니라 대중의 신뢰와 민주적 절차에 뿌리 박은 통합의 지도력이다"고 했었다. 그런데 재선거 참패 후 여당 의원들로부터도 '대통령이 신이냐' '오만하다' '코드 인사 근절' 등 직격탄을 맞았다. '여당을 청와대 입맛대로 끌고 가는 식'의 강권적 지도력이란 비판이었다. 이 역시 책 따로 통치 따로의 경우다.

'경향잡지'도 마찬가지. 만약 그 잡지를 매달 읽어 봤더라면 '예수님의 광고학'이란 시리즈 글을 읽어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화려한 말솜씨보다 진실이 담긴 말이 더 강한 통치력을 갖는다는 진리 하나라도 터득하고 말씀 다듬는 일에나마 도움이 됐을 것이다.

잡지 글의 예를 든다면 그리스의 말재간 좋은 웅변가 아이스 컨스의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가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마케도니아에 대항해 단결하자고 연설했을 때 시민들은 '아! 연설 한 번 잘한다'고 감탄만 한 뒤 광장을 뿔뿔이 떠났다. 대신 데모스테네스란 사람이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을 때 청중들은 '마케도니아를 타도하자!'며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누가 더 훌륭한 설득자인가. '경향잡지' 글 속엔 지도자의 덕목으로 언변보다는 진실을 말한다. 책을 읽는 일은 좋은 일이다. 지도자가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이다. 다만 '생각하지 않고 읽는 것은 씹지 않고 식사하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올 가을 노 대통령의 독서열이 좀 더 행동과 변화로 잘 이어졌으면 좋겠다.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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