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1958~ ) 어머니의 그륵

우리는 흔히 학교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가지고 인간의 됨됨이를 헤아릴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판단기준이다. 자식들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적 삶으로 살아오신 우리들의 부모님! 그분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어렵게 한글을 깨치셔서 멀리 타지로 나가 있는 자녀들에게 종종 귀한 편지를 적어 보내오시기도 한다. 침침한 눈으로 몽당연필에 침을 묻혀서 소리나는 대로 편하게 쓰시던 그 철자법이 얼마나 정감 가는 편지였던가? 점점 차가워지는 날씨에 몸단속 잘하고 다닐 것과 조석 잘 챙겨 먹고 다닐 것을 포함하여 옆집 소가 출산을 한 이야기랑 일가친척들의 정황까지 두루 적으셨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지금은 앨범 속에서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부모님의 편지가 세월이 갈수록 귀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동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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