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9월, 국내외에서 처음으로 대구에 백남준 미술관이 건립된다는 소식에 서슴없이 작품과 돈을 냈던 후원자들의 '7년 기다림'이 결국 무산되면서, 주최 측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선생을 직접 만나 미술관 건립을 약속받았다"고 떠벌리고 다닌 경북 김천 모 대학 여 교수(45)의 말을 믿고 선의로 작품을 기부했거나 10만 원 내외 후원금을 낸 600여 명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됐다. 이 같은 일을 저지른 ㅎ교수는 지난 2003년 대구 하계 U대회에서도 4억 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퍼포먼스 비용으로 따내 시민 운동가들의 의혹을 사기도 했다. 종적을 감춘 여교수 ㅎ씨와 관련자들이 벌인 행각의 사기 여부는 수사에서 밝혀지겠지만 대구는 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됐다.
피란 시절, 전국의 문화 예술인들이 전화(戰禍)를 피해 대구로 몰려들면서 이 지역은 문학과 음악 그리고 미술이 살아있는 문화예술 도시로 자리 잡았다. 때맞춰 지역 섬유업체들의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고용에 앞장서면서 대구 문화는 르네상스를 맞았었다. 그러나 산업 구조 고도화 시기를 놓친 데다 위천 국가 공단 조성이 무산되고, 대기업 유치마저 실패하면서 대구의 위상과 생산성은 추락 일로를 걸었다. 그런 차에 백남준 미술관을 건립한다는 소식은 대구에 새 희망을 심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다가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다.
백남준 미술관 건립의 불발로 인해 대구는 큰 상실을 겪게 됐다. 가장 큰 상실은 국제적인 문화 도시로 탈바꿈할 기회를 놓쳐 버린 데 있다. 행위 예술과 비디오 아트 그리고 레이저 아트까지 넘나들며 한 세기를 풍미하고 예술계의 별이 된 백남준을 기리는 사업은 그와 연고가 있는 한국 독일 미국 일본 각국이 다 탐냈다. 어느 나라의 어떤 도시가 먼저 주도권을 잡아 성사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무슨 일이든 추진하는 속도가 늦고 결정이 더딘 대구가 웬일로 이 사업에서는 앞선다 싶더니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욕은 거창했으나 백남준 미술관을 끝까지 밀어붙일 추진력도, 회계 업무를 투명하게 처리할 양심도, 지역 사회의 폭넓은 관심을 끌어낼 묘안도 갖지 못한 몇 사람이 설치며 이 일을 추진하는 것을 대구의 지식인 사회는 방치했다. 사업의 경쟁성에 대한 냉정한 검증과 미래의 가치성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고만고만한 몇 사람이 몰려다니며 일을 벌이다 실패하여 아이디어만 뺏긴 채 지역민은 문화적, 심리적 충격에 빠져 있다.
피해액만 1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경찰이 추산하는 이 사건에 휘말려 대구 사회가 휘청거리는 동안 우리보다 2년 늦게 뛰어든 경기도가 백남준 미술관 건립을 성사시켰다. 문화가 도시 경쟁력의 근본임을 간파한 지자체와 문화인들의 협조가 이뤄낸 작품이다. 이미 국제 공모를 통해 당선된 백남준 미술관 건축은 작고 100일이 되는 오는 5월 9일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에서 착공될 예정이다. 1만여 평의 널찍한 도유지에, 거장의 작품을 67점이나 확보한 경기도는 4일 장례식이 끝나면 유해를 받아서 이곳에 안치할 예정이다.
경기도는 백남준 미술관 유치에 성공하면서 대번에 도시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문화 마케팅에 성공했다. 문화는 교육과 함께 정주 여건을 결정짓는 양대 요소 가운데 하나로 정주 여건의 개선은 우수한 인재와 기업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지녀 도시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백남준 미술관 건립에 실패한 대구 사회가 반성할 일이 없을까. 지금까지 지역 사회가 어떤 사업을 추진하든 원칙과 경쟁력을 갖춘 적임자보다는 평소에 잘 아는 사람이나 업무에 토를 달지 않을 예스맨, 자기 편만 챙기는 기득권층을 보호하는 패거리 문화를 용인한 결과가 이번 일과 연결되지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대구의 지식인들이 각종 민·관 사업에서 투명한 감시와 순수한 봉사 정신을 발휘하지 않는 죽은 사회라면,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은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최미화 논설위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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