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⑬작가 지하련의 대구시절

1932년 1월 말, 대구경찰서 유치장 여감방에는 여성사상범 혐의자들이 다섯 명이나 한꺼번에 수감되는 드문 풍경이 벌어졌다. 그 전 해 7월 대구에서 열린 '공산주의자협의회'의 조직 활동에 가담한 여성 오르그(조직자)란 것이 일경이 밝힌 이들 수감여성들의 '정체'였다. '공산주의협의회사건'(약칭 '공협사건')이란 1. 2차 공산당사건으로 조선 공산당의 조직이 와해되자 잔여세력이 조직부활을 꾀하고 처음 서울에서 협의회를 조직하려다 여의치 않자 대구에서 재차 협의회를 갖게 된 것을 뜻했다.

여성사상범 혐의자들은 일경의 눈을 속여 가며 남편의 조직 활동을 도운 아내이거나, 아예 부부로 위장한 동지사이, 혹은 주동자의 친인척 여인이었다는 것이 일경의 발표였다. 이들 중 가장 눈길을 끈 여인은 갓 스무살의 앳된 처녀인 이현욱(李現郁. 호적명 李叔姬)이었다. 바로 8년 뒤의 여류작가 지하련(池河連)이자, 이 '공협사건'의 고위 조직자였던 이상조(李相祚), 이상북(李相北)형제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두 오빠들을 도와 대구고무공장의 여공들을 조직에 끌어들이려 한 혐의로 구금되어 있었다. 일경의 한 자료집에 의해 최근 밝혀진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어떤 '지하련 관련 연구서'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내용이다. 이 사건의 수사반장 역시 '조선은행 폭탄사건' 때 장진홍의사를 체포한 악명 높은 조선인 고등경찰관 최석현이었다.

구금된 지 석 달째인 4월 말, 그녀는 때마침 5월 1일의 메이데이를 앞둔 일경의 이른바 '예비검속'에 걸려 7호 감방에 들어온 대구의 좌익청년들과 유치장에서 조우하게 된다. 서로 지면이 있는 사이라, 이현욱은 미소로서 알은 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감색 치마저고리에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짓던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가 못내 잊혀지지 않았다"고 먼 뒷날까지 회상하게 된다.

5월 하순 '예비검속'에서 풀려난 청년들은 2년여의 징역판결을 받은 오빠들과는 달리, 6월 중순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현욱과 대구의 한 다방에서 담소할 기회를 가진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동지애란 일정한 선을 넘으면 상실해버리니 그 점 가장 경계해야 해요"하고 말한다. 청년들은 "대단한 미모인데다, 애교까지 부리며 마치 합법적 운동의 연애관이나 강의하듯" 하는 그녀의 "인상적인 매력의 말"에 다시 한번 넋을 빼앗긴다.

동지애를 강조하며 대구 청년들의 구애를 미리 차단할 줄 알던 이현욱은 그러나 2년 뒤, 정작 자신은 아이 딸린 이혼남이자, 폐병환자인 카프 시인 임화(林和)와 전격 결혼함으로써,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마산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두 오빠가 어째서 고향을 두고 '공협'의 경북대표가 되어 대구에서 활약했느냐는 것부터도 의문이다. 동경에서 여고를 졸업한 인텔리인 이현욱의 경우도 혈연으로서 피치 못해서가 아니라, 오빠들의 사상에 전적으로 공감했기에 여성 오르그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임화와의 결혼동기 역시 애정이나 연민에서가 아닌 사상적 동지애에서 출발했던 것일까.

뿐더러, 결혼 후 단숨에 주목받는 여류작가가 된 것도 신기하지만, 일찍 월북한 뒤 남편 임화가 "미제의 스파이"란 죄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된 것 자체부터 의혹투성이다. 그녀가 구명을 호소하려 찾아갔을 때, 문단의 선후배들이 보여준 차디찬 반응에서 느꼈을 처절한 배신감은 어떻게 풀이해 보아야할까. 대구에는 여류공산주의자로 일찍이 고명자(高明子)가 있었고, 부녀동맹의 맹장인 정칠성(丁七星), 우신실(禹信實), 정귀악(鄭貴岳)도 있었다. 이들에 비하면 이현욱의 활동상은 미약하고도 짧았다. 그럼에도 대구의 좌익청년들이 오래토록 그녀를 못 잊었던 것은 '낭만적 좌익시절'에 보여준 그녀 특유의 '창백한 지성미'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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