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 에세이]신천변을 걸으며

오랜만에 저녁 노을이 곱게 물든 신천변을 걸어본다. 몰라보게 변한 모습, 그 맑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걷는다.신천은 팔조령에서 발원해 용두산을 감고 돌아 건들바위'반월당'달성공원을 지나 달서천과 합류해서 금호강으로 흘러가던 대구의 젖줄이었다. 달구벌 주민들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샛강이다.

지난날 맑게 흐르던 물에 멱을 감고 피라미를 잡던 신천은 한동안 개발의 논리와 정화사업으로 추억 어린 옛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 그러나 오늘의 신천은 아름다운 조경과 멋스런 풍광으로 새로운 단장을 해 찾는 이의 마음을 한결 즐겁게 한다.

황혼 무렵 신천변을 거닐다 보면 잘 다듬은 축대며 곳곳에 심어둔 수목과 꽃나무들로 조화롭게 가꾼 조경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낙조로 채색된 연홍색 강물, 그 맑은 물에 드리워진 주변의 모습들 그리고 아름답게 핀 꽃들과 어우러져 투영된 영상은 어느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한 폭의 유화요, 수채화다.

신천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요, 생명의 젖줄이요, 우리 역사와 함께 영욕의 세월을 지니고 흘러온 강이다. 봄이면 꽃이 피고 입이 돋아 연녹색으로 채색되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그럴 땐 철마다 색다른 감흥을 느끼게 한다.

춘색(春色)이 감도는 신천을 보지 않고 누가 감히 내 고장의 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더럽혀진 신천, 추악한 나신(裸身)을 드러냈던 꼴불견의 모습은 옛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젠 잘 다듬어진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을 부르는 것이다.

신천은 위대한 자연이 창조한 절묘한 구성미와 현란한 몸짓으로 새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서곡이요, 위대한 자연의 대향연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넓은 신천변은 온통 꽃으로 단장된다.

흰 비단처럼 수줍은 듯 앉아 있는 피튜니아, 여인의 고운 입술 같은 빨간 칸나, 물오른 처녀들의 볼 같이 탐스런 튤립, 온갖 꽃들이 제 빛을 시샘하며 겨룬다. 잠시 강변에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강심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내 어릴 때 신천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개발의 논리에 밀려 사라진 역사의 흔적을 잃은 상실감과 변화하는 조류에 새삼 무상함을 느낀다. 흐르는 세월과 사라져 가는 역사가 다시 조명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오늘의 신천이었으면 어떨까?

맑은 하늘엔 점점 구름이 떠돌고 메마른 대지엔 파란 잎새가 고개를 내민다. 긴 동면을 견디어낸 강인한 생명력에 경탄을 금할 길 없다. 돋아나는 잎새엔 계절의 향내와 계절의 빛깔과 계절의 정취와 계절의 소리가 배어있다.

진한 꽃향기가 비선(鼻腺)을 자극하며 가슴으로 봄을 느끼게 한다. 달구벌의 젖줄. 신천은 봄의 서정을 느끼게 하는 우리 고장의 명소요, 온 가족이 찾아 쉬는 쉼터다. 승용차로 새로 난 쭉 뻗은 동서 강변도로를 달려보면 수목으로 꽃으로 잘 가꾼 조경에 새로운 정취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물이 없던 신천에 물이 흐른다. 축대를 따라 내려가 강물에 손을 씻어본다. 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고 갈파한 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상선여수(上善如水). 노자(老子)는 가장 으뜸가는 선(善)은 물과 같다 했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다.

인생은 물과 같이 흘러간다. 역사도 흘러가고 모든 존재도 물과 같이 흘러갈 뿐이다. 물은 생명의 소리요, 존재의 소리요, 영원히 생성하는 자의 소리다. 소설 '싯달다'에 나오는 헤르만 헤세의 이 말은 누구나 공명 공감할 수 있는 명언이다.

헤세는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귀를 기울이는 것을 강에서 배웠다고 했다. 신천변을 걷는다. 변모된 신천의 어제와 오늘을 생각하면서 '상선여수'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리고 돌아가 '싯달다'를 또 읽어보리라.

김재형(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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