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손을 잡은 중년 부부가 나를 스쳐지나 새벽안개 그윽한 관악산 쪽으로 걸어갔다. 밤을 지새우고 아침을 거른 채 학교로 향하던 나는 그렇게 행복한 부부를 만나곤 했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그 부부의 모습은 뜬금없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진 철거민들이 몰래 일군 산 중턱 동네의 판잣집에서 나는 대학시절을 지냈다. 내가 잠을 설친 것은 간밤의 부부싸움 때문이었다. 부부싸움은 그 가난한 동네가 거르지 않는 밤의 의식 같은 것.
실업자 남편들이 고달픈 아내들을 가혹하게 때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남자인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제나 저제나 아버지들은 폭군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황톳길을 털레털레 내려가면서 어둡기만 할 나의 앞날을 떠올렸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아버지를 닮는다 하니 나도 폭군이 될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은 나에게 대물림될 것만 같았다.
그런 나에게 이른 새벽 건강을 위해 산을 오르는 그 중년 부부는 범접하기 어려운 이상향 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처럼 보였다. 그들은 꿈결인 양 나에게 다가와서 나의 기를 죽이고는 아득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기가 죽은 나는 속으로 아버지를 더 미워했다.
어제는 아이와 함께 '맨발의 기봉이'란 영화를 보았다.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기봉이가 항상 웃는 얼굴로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군것질 거리도 사드리는 모습을 보니 '정상인'인 내가 참 부끄러웠다.
그가 산 정상에서 자장면을 주문해 먹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요일인 오늘 바쁜 일이 생겨 연구실에 나왔다. 점심때를 놓쳐 배가 고팠다. 기봉이가 먹던 자장면 생각이 났다. 시장 중국집으로 가서 자장면 곱빼기를 시켰다. 그때 노인 한 분이 들어왔다. 노인의 얼굴에 주린 기운이 역력했다.
"자장면 하나 시킬 테니 양을 좀 많이 줄려오?" 500원 더 주고 곱빼기를 시키면 될 텐데 저렇게 구차하게 구실까. 조금 뒤 거울 속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어릴 적 한 장면이 울컥 떠올랐다. 아버지는 강 밭의 수박을 재배하느라 등을 까맣게 태웠다.
긴 장마기를 기다릴 수 없어 헐값을 예상하면서도 수박을 내었다. 부산 부전동 청과물 시장에 수박을 부리자마자 아버지는 중국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자장면 사 달라 노래 불렀던 나였다.
수박값이 폭락해 운임과 자릿세를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지만 아들에게 자장면이라도 실컷 먹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과 보통 한 그릇을 시켰다.
백석 시인의 '국수'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국수 면발 가득 사려진 왕사발과 새끼사발. 나의 아버지는 당신 앞에 놓인 왕사발을 어린 아들 앞으로 밀어주고 새끼사발은 당신 앞으로 당겨갔다. 오늘, 왕사발 앞에 다시 앉은 나는, 자장면 곱빼기를 시키지 못하는 그 노인을 바라보며 가난하게 살다 일찍 가신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아버지를 폭군으로 만든 것은 가난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은 폭행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오십이 넘어서야 깨닫는다. 아버지 마음속에 서려있던 서글픔을 읽지 못한 나는 장애인 기봉이보다 못한 불효자식이었다.
저 노인처럼 나의 아버지도 살아생전 자장면 곱빼기는 마음 놓고 시키지 못했고, 나는 그 아버지를 위하여 단 한 그릇 자장면도 사드리지 못했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어느새 자장면 면발이 퉁퉁 불었다.
이강옥(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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