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생불량성 빈혈 앓고 있는 이민경 씨

김선준(70·경북 문경시 산양면) 할머니는 몸이 아파도 농사일을 쉬려 하질 않는다. 큰손녀 이민경(23) 씨가 말려도 요지부동이다. 당뇨, 고혈압에 골다공증까지 앓고 있지만 이웃에 일거리가 있다고 하면 기꺼이 쫓아나간다. 지난 해 6월 민경 씨가 쓰러지고 난 뒤 할머니는 더욱 악착같이 일에 매달린다.

재생불량성 빈혈. 민경 씨가 앓고 있는 병이다. 약물치료를 계속 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병원에선 골수이식 수술을 받아야 완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구미의 한 휴대전화제조업체에서 일했지만 이 병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민경 씨는 6살 무렵부터 할머니 품에서 컸다.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두 여동생(21살, 19살)과 함께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뜬 지 오래고, 가진 것은 손바닥만한 농토 뿐이었지만 할머니는 기꺼이 손녀들을 보듬어줬다.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마을을 지나는 시골. 가난했지만 할머니는 손녀들을 애지중지 키웠다.

"할머닌 남의 집 농사를 짓고 공사현장 식당일을 하며 저희를 키워주셨어요. 힘든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요. 저희 때문에 연로하신 연세에도 고생만 하신 거죠."

민경 씨는 초·중·고교 내내 1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차비가 아까워서였고 고생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워서였다. 학교에 다니기도 어려운 형편. 두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했다. 고교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이는 민경 씨뿐이다. 민경 씨가 학비를 낼 때마다 받은 것으로 서류를 처리한 뒤 늘 돈을 되돌려준 담임교사 덕분에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민경 씨의 어릴 적 꿈은 간호사나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은 민경 씨의 희망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고교 졸업 후 바로 공장에 취업을 했다. 할머니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서였다.

"얼마 전 할머니가 이곳저곳 꿰맨 내의를 입고 계셔서 새로 사드린 걸로 갈아입으시라고 잔소리를 했죠. 그런데 할머닌 한사코 안 된다고 하시지 뭡니까. 알고 보니 제가 취업 후 받은 첫 월급으로 사온 거라 내버리지 못하신 거였어요. 이미 5년 전에 사드린 옷인데…."

성실했던 민경 씨는 할머니에게 돈을 꾸준히 보내왔고 할머니는 그 돈을 고스란히 통장에 넣어뒀다. 조금씩 희망이 싹텄다. 두 동생들도 일자리를 구해 제 앞가림은 할 수 있게 되면서 가장 역할을 해온 민경 씨의 어깨도 가벼워졌다. 하지만 민경 씨가 쓰러지면서 그 희망도 물거품이 돼 버렸다.

일을 하면서도 늘 피곤하고 머리가 아팠지만 2교대 근무로 피곤하기 때문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민경 씨. 그러다 잇몸에서 피가 흐르고 열이 들끓기 시작하자 할머니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았고 재생불량성 빈혈이란 진단을 받게됐다.

백혈병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은 것도 한순간, 골수이식만이 답이라는 말을 듣고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다. 일단 췌장에 생긴 물혹은 제거했지만 그 때문에 모아둔 1천500여만 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골수이식 수술비는 2천여만 원. 민경 씨 형편엔 너무 벅찬 짐이다.

직장을 그만둔 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민경 씨는 안타까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할머니가 여기저기 편찮으신 것도 모두 우리 자매 때문이에요. 아무리 일을 그만두라 해도 듣질 않으십니다. 제가 아프니까 더 일에 매달리시는 것 같아요. 할머닌 우리 자매 모두 시집가서 잘 사는 모습 보실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되는데…."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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