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논쟁이 끊이질 않았던 새만금간척사업이우리에게 여의도의 140배에 달하는 국토확장만을 선물한 것은 아니었다.
새만금사업은 33㎞의 방조제로 바닷물을 막는 과정에서 빠른 유속으로 해저퇴적층의 급격한 유실을 가져왔고 이는 3천100점이 넘는 수중의 보물, 고려청자를 안겨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갯벌 층이 씻겨나가면서 800여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려청자가 속살을 드러내게된 것이다.
2일 문화재청과 새만금사업단 등에 따르면 이 유물들이 해저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2002년 4월 한 어민이 9t짜리 소형 저인망어선으로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그물에 걸려 올라온 고려청자 22종 243점을 관계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신고를 받은 문화재청은 산하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수중탐사팀을 동원, 예비탐사를 실시해 같은 해역에서 고려청자 211점을 더 건져 올렸다.
이후 종합적인 발굴이 시작돼 지난 6월까지 5차례에 걸쳐 모두 3천100여점의 고려청자를 인양했다.
이들 청자는 발(바리), 접시, 대접, 통형(원통모양) 잔 등 종류가 다양하며 문양은 양각 또는 음각의 연꽃무늬와 모란무늬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온전한 것이 많아 고려청자 연구는 획기적인 전기를 맞고 있다.
이들 해저 유물이 어떤 까닭으로 해저에 침몰해 묻혀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않고 있지만 새만금방조제 건설의 영향으로 이 해역의 물살이 빨라져 해저퇴적층이 깎여나가면서 노출된 것으로 해양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새만금간척사업의 영향으로 조류 등 해양환경이 변화하고 갯벌 층이 4∼5m 정도씻겨 나가면서 묻혀 있던 유물이 노출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노출된 유물상태와 일부 묻혀 있는 유물의 상태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새만금사업으로 물길이 좁아지면서 골을 형성하고 갯벌 층이 씻겨나간 골층에 주로 매장됐다.
유물 매장처의 지형은 깊이 20∼30cm로 패인 골이 동서방향으로 진행돼 조류 방향과 일치하고 있으며 그 중앙 쪽은 도드라져 있다.
해저토는 매우 단단한 갯벌 흙으로 구성됐으며 유물들은 개별적으로 엎어지거나눕혀 묻힌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으나 골이 형성된 단면 층에서는 일부 포개진 채 묻혀있었다.
이 때문에 발굴팀은 해저표면에 노출된 것을 먼저 건져 올린 뒤 개펄 층 5∼10c m에 묻혀 있던 유물은 대나무로 만든 칼을 사용해 개펄을 제거하면서 인양했다.
새만금사업단측은 방조제 안쪽의 물이 완전히 빠지면 더 많은 해저유물이 발굴될 것으로 보고 있고 문화재청도 이 곳 해역에 대한 중요문화재 가 지정 기간을 오는 12월까지 연장해 추가 발굴에 나서기로 했으며 도굴 등을 막기 위해 해상 순찰을강화하고 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김병근 학예연구사는 "새만금사업이 아니었다면 인근 부안 줄포항에서 12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등의 유물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도자기를 팔아 두둑한 돈주머니를 찼을 사내들과 이들을 기다리며 서글프게 울었을 아낙네들이 눈에 그려진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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