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일현의 교육프리즘)오만과 편견

잘 아는 지인의 아들이 상담하러왔다. 시간이 갈수록 의욕이 떨어지고 까닭도 없이 불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고 했다. 태도와 말투는 겸손했지만 젊은이다운 패기나 자신감이 전혀 없었다.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시험을 잘 쳤을 때는 어쩌다가 잘 친 것이고, 못 쳤을 때는 그게 진정한 자기 모습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다보니 자신의 진짜 실력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려 깊지 못한 잔소리와 기를 꺾는 악담을 속 깊은 격려로 착각한 부모가 아이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은 소설과 영화에서 매우 매력적이다.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재기 발랄하며 자존심이 강한 엘리자베스와 런던 재산가의 아들로 훤칠한 용모의 귀족적인 다아시는 제목이 의미하듯이 '외양과 실제'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오만과 편견의 줄다리기를 절정에 이를 때까지 계속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상호 이해와 신뢰,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오만함과 상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발견과 함께 결혼을 하게 된다.

진부한 해설을 더 보태려고 이 작품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학생과 상담을 하다가 두 주인공이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몇 가지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 젊은이는 다른 등장인물들보다 순수하고 정직하며,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자신감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오만할 수도 없고 비록 궤변이라 할지라도 설득력 있는 편견을 가지기도 어렵다. 젊은 날의 오만과 편견은 세월과 더불어 변증법적인 지양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아발견의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우리는 아이가 좀 자신만만하고 튄다 싶으면 무조건 기를 죽여 놓고 보는 경향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들어온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을 꼼꼼하게 분석해 보자. 가을에 속이 꽉 찬 벼라야 고개를 숙인다. 오뉴월의 어린 벼는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아니 숙여서는 안 된다. 오뉴월에 고개 숙인 벼는 가을이 와도 쭉정이밖에 안 된다. 젊은 날은 빳빳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는 벼처럼 누가 누르면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발전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젊은 날의 지적 오만과 무엇에 관한 편견은 강한 자부심과 자신감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자기불신이 가득한 신중함과 비굴한 겸손보다는 유아독존식의 오만이 차라리 생산적일 수 있지 않겠는가.

윤일현(교육평론가, 송원학원진학지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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