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구보 씨는 동생 누보·두보와 더불어 아버지의 산소를 찾는다. 생전의 아버지는 늘 먼 나라가 1945년 이웃나라의 36년 강점(强占)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외세에 휘둘려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못마땅해 하셨다.
그 강점기에 이십대를 고스란히 보낸 아버지는 광복군이 당시 세계 최강국의 지원 하에 준비한 독립전쟁 직전에 갑자기 '안타깝게도 해방이 되어버린 거'라고 아들들에게 누누이 설명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인 형을 대신해 이웃나라까지 징용을 다녀온 분이었다. 아니 그곳에서 탈출하셨다 해야 하나. 징용지에서 도저히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탈출해 오래 동안 이곳 저곳을 떠돌며 몸을 숨겼다가 '해방'이 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했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 구보씨 형제들과 친구들이 풀어놓는 군대 이야기는 내다 앉아라 할 정도로 비장미마저 풍기곤 했다. 아버지는 1916년생, 다부진 체격에 성실한 분이었다. 평생을 감기 한 번 앓지 않았고 늦잠을 모르셨다.
'해방' 후 처가의 권유로 다른 곳으로 이주해 크게 농사를 지어 살만해지자 먼 나라의 또다른 비극,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더라고 했다. 쌕쌕이 비행기가 콩밭 위로 쌩쌩 지나갈 때 구보 씨의 어린 누나를 휙 나꿔 채 밭고랑 아래 둔덕으로 몸을 굴려 폭격을 피했더란 이야기는 지금도 집안에 구전되고 있다.
종전(終戰) 후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결코 '써먹고 싶지 않았지만' 이웃나라 징용지에서 배웠던 염색기술로 작은 공장을 차리셨다 했다. 그후 십수 년 동안 공장은 제법 규모가 커져 많은 직공들과 일거리로 넘쳐났고 아버지는 큰 삼층집을 지어 구보 씨를 비롯한 가족들과 친척들을 챙겼다.
하지만 후기 산업사회의 물결은 드셌다. 인정(人情)에 특히 약했던 아버지는 온 나라가 부르짖는 기계화와 대량생산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아버지의 눈앞에 다가온 노년은 현실을 극도의 억압과 불안으로 받아들이게 해 결국 아버지를 늙은 빈 둥치 나무처럼 쓰러뜨리게 했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왕산 끝자락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엔 지금 한여름 노을이 지고 있다. 산소 옆 소나무 아래 술잔을 놓고 똑같이 무릎을 감싸쥐고 앉아 삼 형제는 물끄러미 아버지의 산소를 바라다본다.
형제들끼리 아버지의 일생이 마치 먼 나라의 근현대사 같다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은 후이다. 잔정이 많아 아이들에게 언제나 다정다감했고 '해방'·'전쟁' 이야기에 비감해 하시던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너무 그리워 형제들은 서로들 모르게 슬쩍 눈물을 훔친다. 아, 노을이 정말 붉다.
박미영(시인·대구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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