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유언장

부러울 것 없이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小我(소아)를 버리고 大我(대아)를 추구하는 모습은 신선하다. 부자와 천국의 관계를 낙타와 바늘구멍에 비유한 성서 구절은 바로 '내 것'에서 자유롭기가 그만큼 至難(지난)하다는 의미일 터. KSS해운 고문이자 '유서 쓰기 운동' 등 시민사회 활동도 펼쳐온 박종규 전 규제개혁위원장이 최근 어느 강연회에서 1998년도에 미리 써둔 유언장을 공개해 화제다.

○…자신이 평생 행복하게 산 것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컸다고 회고하며 자녀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시신 기증 후 화장하여 동해 바다에 뿌릴 것, 기일에 각자 집에서 사진과 꽃 한 송이로 묵념추도만 할 것, 대신 저녁에 음식점에서 형제간 우의를 다질 것(식비는 돌아가며 내고), 추도는 一代(일대)로 끝낼 것. 박 고문은 유언장에 재산을 사회환원, 우리사주조합, 가족 등 3등분해 두었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체제를 만들어 잇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작고한 김운초 전 한국사회개발연구원장이 남긴 유언장이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인은 생전에 123억여 원을 입금한 은행에 "전 재산을 연세대에 기부한다"는 친필 유언장을 남겼다. 유족들은 은행에 출금을 요청했다가 유언장의 존재를 알게돼 은행을 대상으로 예금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대학 측도 "유언장에 따라 고인의 재산은 학교 소유"라며 소송에 맞섰다.

○…한 치도 양보 않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3년간 이어졌다. 1심 재판부의 조정안은 양측 모두 거부했다. 2심은 "유언장이 은행 금고에 맡겨져 고인과 대학이 증여계약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대학은 대법원에 상고했고, 13일 재판부는 "날인 없는 자필 유언장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례를 통해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유언 당사자의 眞情性(진정성)이 아무리 100% 인정된다 해도 법정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면 무효라는 것이다. 현행 민법은 자필증서'녹음'공정증서'비밀증서'口授(구수)증서 등 5가지 방식의 유언을 인정한다. 자필증서 경우 유언자가 직접 쓰야 하는 것은 물론 날짜'이름'주소'서명날인 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김운초 회장의 유언장 파문을 보며 괜히 이런 노파심까지 든다. '박 고문의 유언장은 규정대로 작성돼 있을까'.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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