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해안 1천리를 가다](30)감포항과 주변 해역

경주 감포항과 그 주변 해역은 난류인 대마도 해류가 대한해협을 거쳐 북상하고 멀리 함경도 강원도 연안을 흘러내려온 한류와 부딪치는 수역으로 고기 맛이 좋은데다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난류를 따라 이동하는 꽁치·방어·삼치·상어 등과 한류를 따라 이동하는 대구·가자미·도루묵 등의 어류와 오징어·문어·소라·전복 등의 연체류도 많다. 그러나 어장의 변화와 시대 상황 등에 따라 한때 많이 잡히던 어종이 서서히 없어지거나 잡히지 않고, 어떤 어종은 새롭게 뜨기도 한다.

◇일제강점기때 잘 잡힌 어종들=조선 중기부터 감포 일대에는 칡덩굴로 그물을 만들어 소규모로 후리질(지인망어업)을 하였다고 해 동네이름도 후리자리(감포 5리)가 있을 정도다. 이후 1920년 감포항이 개항하면서 수산업에 종사하던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대거 건너왔다. 이로 인해 근대적인 대규모의 어업이 이루어지면서 이곳 어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일본인들은 감포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때 중매인조합을 창립했고, 해방 뒤 감포어업조합 이사로도 활동했던 양무줄(89) 할아버지는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수조망·안강망 등의 망어구와 기선저인망어업을 한국에 도입해 방어·삼치·정어리·갈치·멸치 등을 다량으로 잡았었다."고 회고했다. 한 어선은 한꺼번에 1만1천여 마리의 방어를 잡아와 감포항 주변에 산처럼 수북하게 쌓아놓기도 했다.

감포읍 중심부에는 동해안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 어판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모래 펄에 소나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깐 자리에 어판장이 섰다고 해 판장(板牆)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옛날 판장 대신 시멘트콘크리트 건물 안에 어판장이 서고 고기잡이 배들은 어판장까지 접안이 가능하다.

강현희(84·감포읍 대본리)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잡은 고기들 중 기름이 많은 방어와 삼치 등을 시모노세키나 오사카로 실어 갔다."고 말했다. 감포항이 일제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잡히는 어종들=일제시대 일본인 수산업자 아래 한국인은 반농 반어의 영세 연안어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의 패전을 먼저 감지한 일본 수산업자들은 선원이나 잡일을 했던 한국인에게 어선을 주고 떠났다. 패전을 미처 알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던 일본인들은 어선을 버리고 가 졸지에 '횡재'를 한 감포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뒤 한국 어업은 일본 어업에 비해 낙후돼 어획량도 크게 줄었다. 이후 6·25전쟁으로 혼란기가 수습되는데 1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으로 연안에서 12해리가 어업전관수역으로 정해지자 그 바깥에서 자유롭게 조업을 한 일본은 공해에서 새우 등 고급어종을 많이 잡아가는 등 실익을 챙기기도 했다.

임동철 전 경주수협장은 "지난 70년대 들어 동력선과 무동력선 등 어선의 건조가 늘어났고, 어군탐지기 등 새로운 기계의 도입 등으로 어획량도 늘어나 큰 발전을 이뤘다."고 말했다. 지난 70, 80년대는 감포 앞바다와 그 연안에서는 멸치와 꽁치, 가오리, 쥐치, 방어 등이 잘 잡혔다고 한다.

경주수협 김철규 상무는 "당시 멸치는 그물을 터는 과정에서 핏물이 나와 항구 내 수질을 오염시켜 활어가 죽게 되자 입항을 못하게 됐다."며 "꽁치도 근해에서 그물로 잡았지만 불빛으로 빨아들이는 봉수망이 도입되면서 경쟁력이 떨어져 90년대에 거의 잡지 않았다."고 말했다.

방어는 1973년 12월 당시 10억 원 가까이 잡혔다. 그 이후 80년대 한때는 방어 한 마리가 작은 송아지 한 마리 값(25만 원 정도)에 전량 일본에 수출된 적도 있다. 또 지난 70년대 후반부터 감포 선적 배들은 일본 근해 오끼군도에서 대게를, 대화퇴에서 가오리를 많이 잡아오다 뒤에 어군이 쇠퇴했다.

"80년대 초반부터 10여 척의 배가 고둥을 많이 잡아 대구 서문시장 고둥은 거의 다 감포에서 올려 보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1999년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고둥 어장도 일본에 다 빼앗겨 감포에서 출어를 하지 못했다."고 하원 조합장은 증언했다.

◇오징어가 안 잡힌다.=동해안에서 수많은 어종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많이 잡혔다가 안 잡히거나 못잡는 등의 부침이 심했다. 하지만 오징어만은 최근까지 동해안의 마지막 남은 '효자 어종'이었다.

현재 동해안 어민들에게 있어 오징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60∼70%. 그러나 오징어가 예전만큼 잡히지 않자 경주수협 위판액이 2004년 425억 원에서 2005년 300억 원으로 줄었다. 오는 9월말쯤부터 시작되는 오징어 성어기에 수확이 클지에 대해서는 많은 어민들이 회의적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한이군(56) 경주선주연합회장은 "난류를 따라 이동하는 오징어를 2004년부터 최고 1천100여 척의 중국어선단들이 북한 원산만에서 '싹쓸이'를 하면서 오징어 어군의 남하를 차단해 남한의 동해안에서는 오징어를 잡을 수 없다."며 "이 때문에 감포항 선적 등 동해안 배들이 고유가에 과도한 경비를 지출해가면서까지 서해까지 가 오징어를 잡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경주·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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