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즐겁다. 최대 명절 한가위가 이제 열흘 남짓이다. 밥상이 풍성해서 좋고, 오랜만에 친지들을 마주해서 흥겹다. 하지만 '극(極)과 극(極)을 달리는' 우리 사회는 명절 풍경을 갈라놓고 있다.
가난해서 흩어진 가정엔 절망만 남았고, 추석이라는 글자가 자리할 곳이 없다. 이런 가운데 또다른 한켠엔 '차고 넘치는' 화려한 명절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어스름이 완전히 내려앉은 지난 20일 오후 8시. 대구 서구 상리동 세방골 산자락.
벽돌을 얼기설기 쌓은 뒤 지붕만 슬레이트로 올려놓은 작은 집이다. 아파트에 익숙한 취재기자에게는 이런 집이 낯설기만 했다. 그 집 앞에 일흔이 훨씬 넘어보이는 노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김판철(62·가명) 할아버지는 큰손녀 지영(14·가명)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영이는 전날 안들어왔단다.
지영이는 가끔 안들어온다고 했다. 파지를 주워 팔아 하루 몇천 원도 손에 쥐기 힘든 할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희영(13·여·가명)이와 남동생 호용(가명·11)이. 할아버지는 지영이가 이 '절망의 보금자리'를 자주 비우는 이유를 잘 안다고 했다.
7년전 아들 부부는 이 아이들을 할아버지 품에 남겨둔 채 떠났다. 그리고 소식을 끊었다. 설상가상. 3년전 아내도 '지긋지긋한 삶'이 싫다며 집을 나가버렸다.
할아버지는 동사무소에서 받는 월 45만 원으로 살아간다. 월세 10만 원을 내고나면 남는 돈은 35만 원. 이 돈으로는 아이들 학교 준비물 사대기도 빠듯하다.
3년전 찾아온 중풍으로 허리와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할아버지.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침 일찍 파지와 고철을 주우러 나간다. 1천 원짜리 1, 2장을 건지기 위해 하루 10시간을 밖에서 보낸다. 집에 돌아오면 겨울나기를 위해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
툭하면 쌀이 떨어진다. 한창 클 나이인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반찬값을 아껴보겠다며 집 옆 텃밭에서 고추와 깻잎을 직접 키워 밥상에 올려본다. 하지만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는 반찬이다.
할아버지는 손자·손녀에게 미안한 것이 또 있다. 옷이며 이불은 대부분 주워온 것이다. 중풍을 앓는 할아버지는 빨래를 할 수 없다. 이불에서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희영이와 호용이는 먹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고 했다. 생각만 할 뿐 먹을 수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호용이는 추석이 싫다고 했다. 냄새나는 집에 오래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
"어린 지영이까지 이 곳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할애비에게 조금만 더 기회를 줬으면 해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불쌍해 절대로 못 죽습니다."
지영이를 위해 이번 추석만은 차례음식을 할 것이라는 할아버지. 앞으로 남은 열흘동안 열심히 파지를 줍고, 고철을 모을 것이라 힘없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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