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론] 4절(節) 1날

국립국어원에서 간행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국경일을 "나라의 경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법률로 정한 경축일. 우리나라에는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이 있다."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한글날'이 국경일로 제정되었으니까 여기서 '한글날' 하루를 더 넣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국경일은 묘하게도 네 개의 절(節)뿐이었으나 이번에 한글날이 더 늘어나 네 개의 절에 한 개의 날이 더 보태어진 셈이다. 또 한 가지 묘한 것은 앞의 네 절은 모두 공휴일인데 한글날은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이다.

네 개의 '절(節)'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 이상하게도 모두 일제 36년간의 침략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날들 뿐이다. '삼일절'과 '광복절'이 그렇고, '제헌절' 또한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가를 세우고 그 기틀인 헌법을 제정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절' 역시 일제 36년 이후 조국 광복 이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 네 개의 절(節)로 된 국경일은 모두 일제 침략과 관계되는 날뿐이다. 나라의 경사를 기념하는 날을 국경일로 한다면서 아직도 수치스러운 지난 역사의 현실에서 단 한 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들다.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은 지난 일제 시대에 반민족적 앞잡이 노릇을 한 인사들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통해 우리들의 후손들은 다시는 그러한 역사적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지사들을 현창하는 삼일절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새로운 나라의 탄생과 그 나라의 기본이 되는 헌법을 창제한 날을 기념하는 제헌절, 이 모두 의미 있는 국경일임은 분명하다.

이 네 개의 절은 전부 삼일+절, 제헌+절 등과 같이 한자 조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글날만은 '한글+날'과 같이 한글 조어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네 개의 국경일을 뜻하는 복합어 00절(節)의 의미는 전혀 '날'의 의미와 무관하다는 데 있다. '절기' 또는 '24절기'·'철'의 의미를 가진 것이지 어떤 특정한 날을 뜻하지 않는다. '00절'과 같은 일본의 한자 조어 방식으로 만들어진 국경일의 이름이 일제 침략사와 관련된 국경일의 이름에만 붙어 있는 것은 왠지 탐탁하지 않다.

다시는 그러한 민족적 굴욕의 전철을 되밟지 말자는 교훈을 삼기 위해 만든 국경일이라면 그 이후 현대사에서 민중들에 의한 민주화 투쟁의 날들도 많이 있다. 특히 일제 36년 이전 역사에서도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또 기념할 수 있는 날 또한 매우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직지심경의 활자를 발견한 날이라든지, 민중의 힘으로 독재 권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한 6.29 민주화의 날이라든지 자랑스럽게 기념할 날이 많은데 왜 일제 36년간의 민족적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날들만 경축일로 정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

지난 과거에만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민족의 자긍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뜻 깊은 날을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그런데 4절 1날 가운데 가장 늦게 국경일로 지정된 '한글날'은 앞의 4절과 전혀 다른 날이다. 개천절 다음으로 오래된 날인 한글날이 국경일로는 제일 마지막으로 지정되었다.

한글날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인 '훈민정음' 창제의 위업과 세종 정신을 기리며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한글날 기념일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의 예의를 창안한 1443년을 기준으로 하느냐 아니면 반포일인 1446년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남과 북에서는 각각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날짜가 각각 다르다. 국가가 제정한 국경일조차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기왕에 제정된 10월 9일 한글날의 개념을 좀 더 확대시켜서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는 '세종의 날'로 발전시키는 일도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국경일도 이젠 국민 모두가 긍지를 가질 수 있거나 민족의 역사를 한 차원 더 높이 발전시킨 날을 택하여 민족사의 기념일로 정하는 논의를 시작해 봄 직하다.

이상규(국립국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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