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스리나가르(Srinagar)로 가는 길, 무장한 군인들의 끊임없는 검문검색에 여행자도 지쳐가고 있다.
파키스탄과 오랜 영토 분쟁 중인 북인도 주변은 이슬람과 힌두교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준 전시 상태다.
"저 사람들은 왜 총을 들고 있는 거지?"
어린 왕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는다.
"지키는 거지. 자기들의 땅과 신을."
지킨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빼앗는다는 말의 또 다른 말에 지나지 않았다.
" 어른들은 이상해. 왜 지키고 빼앗으려 하지. 정말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아! 단지 세 걸음만으로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너무나도 작은(?) 별에서 단 한 송이 장미를 위해 눈물을 흘리던 어린왕자인 적이 있었다. 어둠이 스며들 때 까지 뛰어 놀던 초등학교 운동장은 얼마나 넓었던가? 그리고 계집아이들의 이름표가 적힌 꽃밭에서 몰래 꽃술을 따먹으며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이가 들어 운동장과 꽃밭을 집착과 소유라는 이름이 대신하고 더 이상 단발머리 계집아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된 것은 눈물 흘릴 사랑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려니…. 기다려 줄 여우도, 찾아갈 꽃도 없는 여행자가 서 있는 자리는 이렇듯 못난 어른들의 전쟁터가 아니던가?
새벽 6시, 스리나가르 버스 정류장은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로 분주하다. 레까지 꼬박 이틀이 걸리는 탓에 큰 배낭을 버스 지붕 위에 싣다가 깜짝 놀란다. 짐을 받아주던 버스 안내원이 입은 조끼 등 뒤에 쓰여 있는 선명한 글귀 때문이다.
'시민에게 봉사를' '인천지하철 공사 버스 노동조합' 반갑고 기쁘다. 분쟁 위험 탓에 서양 여행자들조차도 잘 찾지 않는 곳이기에 이역만리 땅에서 만난 한글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앞가슴에 새겨진 '단결 투쟁'이라는 글귀는 낡아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마치 대오가 흐트러진 한국의 노동운동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자신이 입은 옷의 나라에서 온 여행자가 반가웠든지 안내원은 좌석을 찾아주는 친절을 베풀며 환하게 웃는다. 검문이 뜸해진 시내를 겨우 벗어나자 버스는 오르막을 힘겹게 오른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잠깐 멈춘 쏘나마르그(Sonamarg 2740m)의 산들은 얼핏 눈꽃을 머리에 이고 있다.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추운 곳이라는 기록을 가진 드라스(Drass)를 지나자 하늘은 잔뜩 흐려지고 바람을 몰아오기 시작한다. 조질라(Zoji La 3529m)에서 군부대의 형식적인 검문을 받는 여행자를 두 손자를 끌어안은 노인이 구경하고 있다. 아이들의 눈빛은 뻬헬감(Pahalgam 2130m)의 전나무 숲 속에서 만났던 집시 소녀의 그것처럼 너무나 맑고 선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슬람교도라는 까르길(Kargil 2817m)은 여행자의 힘든 여행에 앞서 조잡한 중국제 기념품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97년 파키스탄의 폭격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상업의 요충지였다지만 숙소를 찾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매력이 없어 보인다.
버스가 늦게 도착한 탓일까? 숙소는 거의 대부분이 가득 차 있다. 합숙을 권하는 여관 주인의 제안에 방을 들어서니 뜻밖에 룸메이트는 서른다섯의 캐나다 여성이다. 트래킹을 왔다가 고산병으로 산을 내려왔다는 그녀는 밤새 앓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지압을 해주면서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관습에 얽매여 있는 탓이다. 여행에 성별이 없듯이 여행자에게도 성별은 없어야 마땅하다고 늘 다짐하지만 쉽지는 않다.
새벽 5시, 여행자의 선잠을 깨우고 레를 향해 버스는 다시 떠난다. 해 뜰 무렵, 짜이 한잔에 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때우고 다시 잠에 취해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차안이 소란해진다. 풀을 찾아 이동하는 수백 마리의 양떼가 길을 막는다. 양들이 지나는 동안 간신히 비켜 선 버스는 천길 절벽 끝에 매달려 있다.
"죽은 물고기만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브레히트였던가? 천 길 낭떠러지 아래 회색 강물은 죽음을 유혹한다. 한 발만 내딛는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저 강물에 닿는 순간만이라도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면…. 마흔 다섯, 정체성을 잃고 떠도는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되어버린 지금, 어쩌면 샹그리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죽음일지도 모른다. 긴 시간 유목민들도 운전기사도 승객들도 아무 말이 없다. 강물은 그저 말없이 흐르고 일순간 어린 양들의 슬픈 울음이 허망한 여행자를 깨운다.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 그 가파른 길 위에 서 있다. 잠시 시름을 잊고 달리던 버스를 다시 막아 선 것은 군용트럭이다. 수십 대의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그저 말없이 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레로 가는 길은 이렇게 더디고 힘이 든다. 보기에도 숨찬 고갯길을 트럭 지붕 위에 앉아 사람들이 넘는다. 그들이 믿는 신은 트럭에 화려한 치장으로 장식되어 있다. 갑자기 '후드득' 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내린다. 지나는 차량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정차한 작은 마을은 때 아닌 활기로 넘쳐난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낯선 이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말린 살구를 파는 아낙네들이 돌리고 있는 마니차(法輪 한 번 돌릴 때마다 한 권의 경전을 다 읽은 것이 된다는 불경을 새긴 통)엔 손 때 묻은 정성이 빛난다. 마을 입구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룽다(불경을 적은 깃발- 바람이 부처의 말을 전한다고 믿는다)와 초르텐(깃발은 꽂은 탑)은 인도의 작은 티벳, 레가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다. 여행에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막막할 때 이런 징표들은 힘이 된다. 때로는 설산으로, 때로는 바람으로, 깃발로, 또 때로는 돌담으로 인사를 전하는 징표들을 만날 때 비로소 여행자는 낯선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쓸쓸한 바람이 황량한 사막에 가득 찬 돌탑을 맴돌고 있다.
드디어 레에 닿는다.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가 쓴 책 '오래된 미래'에서 인류의 구체적인 미래가 개발 이전의 라다크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 바로 그 곳이다. 네팔인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숙소의 이층 방에서 바라 본 한적한 시가지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배낭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거의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은 탓에 다시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숙소의 젊은 주인은 여행자의 늦은 저녁을 내어오다가 불교도 처녀를 힌두교도 청년이 성폭행한 어제 사건 때문에 상가가 철시했다고 말한다.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끝에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몸보다 마음이 아픈 탓일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지만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여행자에게 낯을 가리는 것이라고 위로하는 꿈 길 속으로 바람이 소리를 내며 운다.
전태흥 ㈜미래데이타 대표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