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3천 여명이 사는 제국의 변방도시는 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 바깥은 숲과 들판으로 야만인들이 산다. 문명은 오직 성안에만 존재한다. 성밖의 야만인들은 사냥하고, 채집하며 사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저분하며 무섭고, 이해할 수 없다. 성안에 사는 주민들 중에는 성밖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다. 본 적이 없지만 야만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명확히 안다. 그들의 괴이함에 대해 많이 들었음으로.
변경 도시를 통치하는 하는 사람은 치안판사이다. 그는 여유 있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제국의 중앙에서 취조 전문가들이 도착한다. 전문가들은 야만인들(원주민)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밝힌다. 또한 그들은 혐의가 있어 보이는 원주민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인다. 고문은 잔인하고 집요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원주민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고문당하고 죽는다.
치안판사는 '무엇인가 잘못 돼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처사는 부당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망설임 끝에 '뭔가 좀 잘못 돼 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취조 전문가는 '당신은 너무 편하게 살아서 야만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모른다.'고 대꾸한다. 날이 갈수록 취조 전문가들의 행위는 광포해진다. 치안판사는 도시의 통치권을 조금씩 상실한다. 평화의 시대는 가고, 이제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언제 어디서 야만인들이 습격해올지 모른다는 기류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늙고 무기력한 치안 판사의 힘으로는 성을 지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제 성의 치안은 군인들의 몫이다.
군인들은 대규모 원정부대를 구성해 성밖으로 출동한다. 그리고 수많은 야만인들을 습격 혐의자로 판단해 잡아들인다. 야만인들은 숲 속에서 사냥하거나 혹은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갑자기 말 탄 군인들이 다가오자 두려워 숨었을 뿐이다. 원정부대가 원주민들을 잡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무엇인가 지은 죄가 있으니 달아나는 것 아니겠나, 잡아라!"
일단 잡아들인 다음 고문하면 모조리 불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혐의는 있지만 증거가 없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고문이다. 이는 고래로 어느 정부나, 어느 수사기관이나 가장 즐겨 써온 수법이다. 아무리 고문해도 '불 것'이 없었던 야만인들은 죽거나 수감됐다.
치안판사는 잡혀온 야만인 여자를 동정한다. 여자는 고문당해 시력을 거의 잃었다. 동정인지 사랑인지 불분명하지만 치안판사는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안락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한다. 치안판사는 오직 정의의 마음으로, 순수한 인간애로 원주민 여자를 그녀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래서 여자를 데리고, 일행 몇과 함께 성밖으로 나간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성 밖의 자연은 거칠고도 아름답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가 여자를 고향으로 데려주기 위해 성밖으로 나가 원주민과 접촉했다는 사실은 '야만인과 내통'으로 오해받고, 그는 고문 받고 감금당한다. 이제 치안판사는 허울뿐이던 지위조차 잃었다.
성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야만인들 짓이 틀림없다. 도시 주민들에게 성밖은 이제 위험천만한 곳이 됐다. 대규모 원정대가 성밖으로 출동한다. 그러나 야만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원정대를 피해 더 멀리, 더 깊이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원정대는 더욱 멀리까지 야만인들을 추적한다. 추적이 계속되는 동안 원정 대원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자고 일어나면 원정대원 일부가 시체로 발견되거나 사라졌다.
"멀쩡한 원정대가 하늘로 솟았겠나? 아니면 자다가 저 혼자 죽었겠는가?"
원정대의 죽음과 실종은 야만인의 존재, 야만인의 기습능력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물이다. 원정규모를 더욱 늘리고 작전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원정대는 거의 대부분 죽거나 사라진다. 살아 돌아온 자는 거의 없다. (사실 야만인의 기습 따위는 없었다. 원정부대는 오랜 야영생활과 굶주림 추위를 견디지 못해 탈영하거나 얼어죽었다.)
성안의 공포는 극대화된다. 원정대를 격파한 야만인들이 언제 성으로 들이닥칠지 모른다. 이제 성을 버리고 탈출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하루라도 빨리 달아나는 게 상책이다. 성은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떠난다.
작가 존 쿳시는 이 작품을 통해 제국과 권력은 어떻게 유지되고 작동하는 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존재하지 않는 적(야만인)을 만들고, 그 야만인의 능력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공포를 만들고, 공포에 바탕을 둔 지배를 노리는 제국의 속성을 파헤치는 것이다. 여기에 소통 부재에 따른 절망을 치열하게, 넌더리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만이 작가의 목적은 아니다.
안락한 삶을 살다 한순간 품은 의문으로 삶이 뒤바뀐 치안판사. 그는 부조리를 인식하고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회의하고 고백한다. 내부자의 입을 통해 내부의 부조리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한 비겁한 인간을 변명하려는 장치가 아니다. 작가가 이 비겁하고, 뚱뚱하고, 게걸스러운 치안판사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정의감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정의로운 존재이며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아름답다. 이는 작가 존 쿳시 뿐만 아니라 번역자인 왕은철 교수에게 돌려야 할 박수다. 번역서를 읽을 때 흔히 맛보는 그 모래알을 씹는 듯한 맛이 이 책에는 없다. 서걱거리는 모래알이 아니라, 입안에서 구슬 같은 언어가 또르르 구른다. 기계적 번역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어울리는 번역을 했음일 것이다. 읽기를 막 배운 아이도 아닌데, 소리내어 가며 읽은 몇 안 되는 책이기도 하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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