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7 농촌체험] ①문경 궁터마을

※ 매일신문은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농촌체험 '가자 생명의 땅으로'를 연중 실시, 보도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 한 해 동안 대구·경북 지역민 800여 명이 참가, 도시와 농촌이 상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도농교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국무총리 표창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올해 농촌체험은 2월부터 11월까지 매월 둘째, 넷째주 토~일요일에 경북 도내 농촌에서 1박2일간 열리며 그 다음 주중 지면에 게재됩니다.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고 우뚝 선 것은 백두대간 조항산(951m). 산 너머는 충청북도 괴산 땅이다. '통화권 이탈'. 휴대전화가 터지질 않는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어도 좋습니다'란 광고카피가 문득 떠오른다. 그렇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이 곳에 문명의 이기는 부조화일 뿐이다.

마을을 둘러보러 나선 체험가족들의 볼이 금세 발갛게 상기된다. 매서운 골바람이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천하대장군도 부르르 진저리를 친다. 말간 콧물이 연신 흐르고 아랫목이 간절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 두 손을 꼭잡은 부자 간에, 모녀 간에, 부부 간에 잊고 살던 그 무엇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넓직한 체험장에는 솟대를 만들 준비가 돼 있다. 물푸레나무, 왕벚나무로 다듬은 오리에 저마다 소원을 적는다. '부자 되게 해주세요' '건강하길 바랍니다' '화목한 가정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언 땅을 파고 솟대를 세우고 나니 벌써 소원이 다 이뤄진 듯하다. "하하하 호호호"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산골에 메아리친다.

소박한 저녁상은 웰빙 그 자체다. 마을 계곡에서 잡은 다슬기국에 온갖 산나물과 도토리묵, 숭늉까지. 반찬투정하던 아이들도 이내 한그릇씩 뚝딱 비운다. "저희 집 아이들이 야채를 잘 안 먹는데 오늘은 맛있다네요. 참 신기하죠?"

밥상을 물리고 황토방에 앉아 나누는 헛개나무 달인 물 한잔은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든다. 처음 본 낯선 이들이지만 서먹했던 감정은 온기에 눈 녹듯 사라지고 도란도란 세상 사는 이야기가 훈훈하다. "애 셋 키우시면 힘드시겠어요?" "요즘 경기가 안 좋은데 하시는 사업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제일 즐거운 것은 꼬마녀석들이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냇가로 마당으로 우루루 몰려다니는 게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짚 계란꾸러미 만들기는 보기보다 쉽지 않다. 마을 김정길(65) 할아버지가 만든 계란꾸러미는 모양도 좋고 튼튼한데. 여기저기에서 SOS가 잇따라 날아들고 주민들은 넉넉한 웃음으로 도와준다. "회사일 힘들 때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짓자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 그런 이야기 못하겠어요. 농촌생활이 그리 만만하진 않네요."

밤이 깊자 기온이 뚝 떨어진다. 체감온도가 영하 5℃는 될 성 싶다. 그래도 캠프파이어는 쉽게 떨쳐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춤추는 불꽃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매운 연기에 연신 눈을 부비면서도, 함께 노래 부르며 서로 얼싸안으며 하나가 된다. "여보, 사랑해." "아빠, 엄마 사랑합니다." 산골의 밤은 낭만이다.

아침 세수할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 아궁이의 연기는 사람 사는 냄새다. 넉넉하진 않아도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을 닮았다. 뜨뜻한 미역국으로 간밤의 허기를 달래고 나니 마당이 시끌벅적하다.

"음메~음메~." 아이들을 태우고 동네 유람에 나설 누런 황소와 태어난 지 닷새 됐다는 아기 송아지가 아이들에게 둘러쌓인다. 처음 본 소 오줌 누는 모습에 꼬마들은 기겁을 하면서도 신기한 듯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하지만 어미소는 난처하기만 하다는 표정이다. 아이들과 폐교된 궁기분교 운동장을 뛰노는 송아지가 걱정인 게다. 결국 소달구지 드라이브는 동네 한 바퀴를 채 못돈 채 끝나고 말았다. 지독지정(지는 혀 설 자 옆에 성 씨 자-犢之情). 어미 소가 송아지를 혀로 핥아 주는 마음이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에 다를까. "그래도 저 놈이 밭도 갈고 소달구지 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은 놈인디, 애들이 섭섭하겠구만." 촌로는 되레 미안하다는 표정이다.

지게를 메고 오른 산에서 아이들은 보물을 발견한다. 바위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건 고드름이다. 모두들 지게는 내팽겨둔 채 차가운 고드름 하나를 뚝 떼 한입 베어문다. 그래, 이런 고드름을 언제 봤겠니?

대구로 돌아오는 길, 문경 가은읍에 있는 석탄박물관이 체험가족을 반긴다. 지난 한 해 문경시 인구의 5배 가까운 33만 명이 찾은 관광명소다. 이만유 문화관광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에 모두들 끄덕이다 진폐증으로 시커멓게 된 광부의 폐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소곤소곤 이야기꽃이 핀다.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아궁이에서 고구마 구워먹은 게 제일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와요." "그래, 우리가 만든 솟대가 잘 있는지 보러 또 오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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