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설이다. 결혼한 지 어느새 27년차가 되었지만 그동안 명절이 싫었던 기억은 없다.
명절 증후군이라 하여, 며느리들의 이런저런 고충과 고생담을 들을 때면 우리 시댁에서의 화기애애한 명절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남편의 형제는 다섯이다. 그래서 동서도 넷이다. 그 중에 남편이 셋째인지라 내가 셋째 며느리로 시집을 갔을 때, 위로 두 분의 형님(동서)이 계셨다.
명절 때는 시어머님과 두 분 형님께서 살림에 서툰 내게는 주로 형님네 아이들을 돌보거나 데리고 노는 일이나 하기 쉬운 일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차례로 아래 동서가 들어와 집집마다 아이들이 태어나 식구들이 많아지면서 명절 음식 장만하는 일은 더욱 많아졌지만 또 그만큼 일손이 늘어났으니 며느리 다섯이 북적대는 부엌은 활기가 넘치고 서로에게 맞는 일을 나눠서 하다보면 일찍 감치 일이 끝나곤 했다.
그런 뒤 저녁이면 다섯 형제와 동서가 모여서 윷놀이를 즐겼다. 부부가 한 팀이 되어 다섯 팀이 다섯 종류의 말굽을 서서 우승순위를 겨루는데 잡고 잡히는 윷놀이의 승부는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럴 때 시어머님은 아들 며느리가 흥겹게 노는 것이 흐뭇하셨던지 시원한 감주랑 간식을 내다주셨고, 아이들은 제각기 제 부모를 응원한다고 열기를 더했다.
그리곤 각자가 성의껏 준비해온 선물을 다섯 집이 골고루 꺼내서 서로에게 나누는 시간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설날아침 우리 다섯 형제와 동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어머님께 세배를 드린 후, 다섯 형제 부부가 서로 마주보며 순서대로 서서 세배를 했다.
부부끼리, 형제끼리, 동서끼리, 돈독한 우애와 사랑을 담은 덕담을 나눈다.
시어머님께서는 누런 봉투에 넣은 세뱃돈을 우리 며느리에게 하나씩 나눠 주셨다.
비록 액수는 만 원짜리 한 장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세뱃돈을 받으면서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다.
그 다음 순서대로 다섯 형제가 앉아서 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다섯 동서가 앉아서 아이들의 세배를 받고, 서열대로 줄지어 서있는 아이들에게 초, 중, 고, 대학생에 알맞은 액수를 정해서 세뱃돈을 준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면 세뱃돈의 색깔과 액수가 달라지니까 혹시 어른들이 착오가 생기면 아이들은 자신의 진급을 정확하게 밝히기도 하여 한바탕 웃기도 한다.
설날의 세뱃돈 주고 받는 풍경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즐거운 일이었는데 수년 전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며느리들이 세뱃돈 받는 기쁨이 없어진 것이 아쉬워서 셋째인 내가 맏이이신 큰 아주버님께 청을 했다.
"아주버님, 어머님 대신 저희들 세뱃돈은 아주버님께서 주세요." 큰 아주버님은 크게 웃으시며 그러겠다고 하셨고 그 해부터 지금까지 기꺼이 다섯 며느리에게 아주버님께는 제수인 우리들에게 생전의 시어머님이 주시던 대로 세뱃돈을 주신다.
세뱃돈은 액수가 많고 적은 것보다는 받는다는 그 사실이 즐거움이다. 시숙과 제수 사이는 어려운 사이라고들 하지만 시아버님이 계시지 않는 우리집안에서 아주버님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사랑하시듯 그렇게 늘 우리들을 귀엽게 봐 주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주버님께 애교 섞인 간청도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잘 받아주시니 늘 감사하고 큰댁에서 모두 모여 지내는 시간이 편하고 좋다.
이번 설날에도 아주버님은 아이들과 제수들에게 나눠줄 세뱃돈을 준비해 놓고 우리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
이번엔 내가 아주버님께 색다른 선물을 드릴 생각이다. 그래서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미화 2달러짜리 30장을 어렵게 구해 놓았다. 아주버님과 형님, 그리고 가족 모두에게 올 한 해 행운이 함께하라는 뜻을 담아서 나눠 줄 생각에 명절이 기다려진다.
작지만 소중한 정을 주고 받는 정다운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도 앞으로 또 그렇게 따뜻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리라 믿는다.
김을수(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