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김사인 作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이성선(李聖善) 시인(1941―2001.5)의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우리 시가 진화하다 보니 이런 형식도 나타나는구나.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시가 되다니. 이런 형식이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 그 대책 없는 선량함이 우리 마음의 때를 닦아주기 때문. 이 시를 읽어가다 보면 두 번 가슴이 철렁한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쿵!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에서 쿵! 순정한 마음으로 지은 시 두 벌을 뜯어 이시평시(以詩評詩), 점화우가(點化尤佳)로 지어내는 천의무봉의 솜씨 앞에 더 이상 무슨 누더기 말을 덧붙이랴.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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