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나리 나리 개나리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지난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으며 TV를 켜자 화면 가득 제주도의 유채꽃 풍경이 흘렀습니다. 그 노란 꽃물결의 도저함이란! 순간, 30여 년 전 근무했던 산골 학교, 그 울타리의 개나리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더벅머리 총각선생님 시절, 쌀과 옷가지 그리고 책 몇 권 챙겨 넣은 배낭을 메고 부임했던 학교였습니다. 외딴 산골의 을씨년스런 풍경 속에서 너무도 외롭고 막막하여 늘 둥둥 떠다니다가, 어느 날엔가, 봇물 터져 흘러넘치듯 학교 울타리에 흐르던 개나리 노란 물결에 가슴을 적시며 털썩 주저앉아 생활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었지요.

갑자기 그 산골 학교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 학교 뜰에 지천으로 피어있을 개나리꽃들을 만나 또 한번 노랗게 물들고 싶었습니다. 후닥닥 아침식사를 끝낸 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 풍경을 보여 주겠다며 아내를 꼬드겨 급하게 길을 나섰습니다. 동네 주유소에 들렀다가 신천대로로 차를 내몰면서 나는, 아이처럼 운전대에 손가락 장단을 치며 윤석중의 '봄나들이'까지 꺼내 흥얼거렸습니다. '나리 나리 개나리/입에 따다 물고요.//병아리떼 종종종/봄나들이 갑니다.'

중앙고속국도를 따라 안동 쪽으로 달리다가 의성 인터체인지로 빠져 도리원, 비안을 지나면 안계면 소재지. 그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50여 리 산골길. 생각 속에서는 늘 아련하게 멀기만 하던 길이 자동차로는 순식간이었습니다. 그 옛날, 주말마다 반찬통이 가득한 가방을 메고 돌 자갈길을 느릿느릿 기어가던 버스 속에서 흔들리던 기억을 더듬으며, 말끔히 포장된 길을 따라 몇 굽이 산모롱이를 돌아드니 아, 그 학교가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산기슭에 납작 엎드린 교실, 조례대 양 옆의 큰 소나무, 국기게양대, 운동장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철봉, 시소…모두가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지천으로 피어 쫑알대야 할 개나리꽃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가가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개나리나무란 나무는 하나같이 교수형을 당한 것처럼, 윗부분의 꽃눈 틔울 새 가지를 싹둑 잘린 채, 원줄기로만 서 있었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노오란 꽃등 하나 내달지 못하는 이 개나리들은 속으로 또 얼마나 깜깜할까,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듯한 개나리 무리를 차마 오래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무슨 놈의 전지를 그따위로 한담. 되돌아오는 길 내내 허전하고, 안타깝고, 분했습니다. 나들이 차량으로 도로까지 막혀 짜증까지 더했습니다. 운전대를 아내에게 넘기고 못 먹는 소주까지 한잔 걸쳤습니다.

'개나리 우물가에/사랑 찾는 개나리처녀//종달새가 울어 울어/이팔청춘 봄이 가네//어허야 얼씨구 타는 가슴/요놈의 봄바람아….'

김동국(시인)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이정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은 22일 현직의 자동 공천을 부정하며, 공정한 경쟁을 위한 공천 기준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를 당을 ...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변화로 인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상호관세 부과를 위법으로 판결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글로벌 관세...
정치 유튜버 전한길이 그룹 슈퍼주니어 최시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3·1절 기념 자유음악회'에 초청했으나, 가수 태진아 측은 출연 사실을 ...
태국의 유명 사찰 주지 스님 A씨가 여러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논란에 휘말렸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 유포된 영상에는 A씨의 아내가 다른 ..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