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예천 금당실과 선동 마을

아지랑이 한들거리는 봄 들녘 저 너머, 고즈넉한 농가 담장 위를 기웃거리는 노란 산수유 꽃이 단발머리 어린 누이처럼 곱게 웃는다. 연두 빛 산과 계곡에는 갓 피운 연분홍 진달래가 가냘픈 꽃잎을 흔들어댄다.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의 정자들 동쪽에 위치한 병암정(屛巖亭).

병풍 같은 큰 바위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정자가 굽은 노송 두어 그루를 지킴이 삼아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 인공섬 하나가 작은 나무다리로 연결돼 있다. 연못 한 가운데에서 정자를 올려 볼 수 있게끔 운치 있게 지어졌다.

멀리서도 병암정이 이렇듯 한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드라마 '황진이'의 촬영지라는 유명세 덕분이다. 화면 가득했던 황진이(하지원 분)와 김은호(장근석 분)의 애틋한 사랑은 아직도 병암정 앞 연못에 녹아있는 듯 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에 몸이 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은호가 실에 끼운 반지를 황진이에게 건네는 장면. 화사한 한복차림의 황진이가 국화 깔린 다리를 건너는 모습. 그리고 그 둘의 첫 입맞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황진이도 은호도 없다. 아쉽게도 구름다리 일부마저 모두 철거됐다. 건 듯 분 봄바람에 연못이 일렁거리자 두 연인의 애절함이 언뜻 스친다.

병암정은 19세기 전통적인 정원의 모습을 잘 간직한 정자로도 유명하다. 연못, 인공섬, 입지조건 등이 전통정원애호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정자 오른편 3칸 맞배지붕의 별묘(別廟)는 인산(仁山)서원의 사당을 옮겨놓은 것이다.

옛날식 다방과 구멍가게, 철공소와 나지막한 돌담길, 고택과 어우러진 마당의 장독대, 한적한 오지마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일대는 드라마 '황진이'의 첫 사랑의 무대가 된 병암정을 시작으로 영화 '영어완전정복'과 '나의 결혼 원정기'가 촬영된 금당실 마을과 '그해 여름'을 찍은 선동마을이 입소문을 타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용문면이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바로 60~70년대 우리네 농촌 풍경이 잘 보존돼 있어 드라마나 스크린의 배경으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나른함이 일상을 짓누르는 4월. 스크린 속 아련한 봄 향기를 좇아 금당실 마을과 선동마을을 찾았다.

◆'물위에 뜬 연꽃'을 닮았네-금당실 마을

금당실 마을(용문면 상금곡리)에 들면 옛 모습의 고택들과 구불구불 얽혀 있는 돌담길이 정겹게 다가온다. 허리춤 높이의 돌담길은 길게 곡선을 그리며 마치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어떤 곳은 기와로 담장을 얹었고 어떤 곳은 짚으로 담장을 장식해 놓았다.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흘깃흘깃' 낯선 집안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관음증 탓이 아니다. 꼭꼭 닫힌 도시의 주택가와 달리 집집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담장이 낮아 집안이 훤히 보인다.

무작정 돌담길이 이끄는 대로 걷다보면 마을 안쪽에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저마다 노란 번호표가 부착된 소나무들은 상단부에만 가지와 솔잎을 피워 얼핏 키 큰 버섯 형태를 띠면서 몸통은 이리저리 굽어 있다. 모양새를 가만히 보면 허리 가는 여인들이 군무를 추고 있는 듯하다.

소나무 숲 뒤 쪽에는 잘 정비된 금곡서원이 있다. 소백산자락에 깃든 '조선 10승지'로서 반상의 문화가 공존했던 마을답게 금곡서원은 단아한 기와가옥들이 배치돼 있어 옛 선비들의 정갈한 삶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1천여 가구가 사는 금당실 마을에서 영화촬영지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은 박춘수(작고) 씨댁. '나의 결혼 원정기(2005년)'가 촬영된 곳이다. 마당에는 장독대만이 집을 지키고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

'영어완전정복(2003년)'이 촬영된 박연이 씨댁은 최근 복원공사가 마무리 돼 둘러보기에 별 무리가 없다. 박춘수 씨 집과 조금 떨어져 있다.

봄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즈음 금당실 마을을 벗어나 선동마을로 가는 차에 눈에 띤 사괴당 고택은 돌담장 안에 펼쳐진 넓은 마당과 정면 5칸의 ㄷ자형 팔작지붕 안채, 초가를 얹은 이층 대문채가 인상적이다. 조선 후기 주책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고즈넉한 벽촌의 풍경-선동마을

금당실 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선동마을(선 2리)은 영화 '그해 여름(2006년)'의 주 촬영지라 할 수 있다.

용문면사무소를 지나 사괴당 고택을 끼고 좌회전하면 다다르는 선동마을은 전형적인 벽촌이다. 석영(이병헌 분)과 정인(수애 분)이 만나는 결정적 계기인 석영의 농촌 봉사활동 장면 대부분이 이곳에서 찍었다.

선동마을 가는 길은 전형적인 농촌의 봄 들녘풍경을 연출한다. 계곡과 산자락엔 땅의 온기가 솟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계단식 논과 밭둑엔 봄나물이 무리를 지어 연녹색의 옷을 입고 있다.

선 1리를 지나 2리 선동마을에 들면 초라한 선동분교가 가장 먼저 눈에 띤다. 봉사활동 온 학생들과 마을 주민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석영과 정인이 손을 잡는 장면 등 스크린 속 장면들이 스쳐가는 선동분교는 교실 2개가 전부인 폐교로 운동장에는 녹슨 미끄럼틀과 단상이 영화 속 추억을 더듬는다.

교실 벽에 쓰인 '푸른 꿈을 가꾸는 즐거운 학교'라는 슬로건은 자꾸만 비어가는 농촌학교의 현실을 무색하게 만든다.

화재장면을 촬영한 분교 옆 교회 터에는 역시 녹슨 종과 종루만이 보인다. 정인의 집이었고 정인이 마을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던 곳인 선동마을 주민(정병식, 정기봉, 정원섭 씨)의 집과 논밭도 찾아볼 수 있다.

◆금당실 마을과 선동마을 주변 볼거리

선동마을을 나와 다시 금당실 마을을 거쳐 928번 지방도를 따라 동로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초간정(草澗亭'보문면 죽림리)이 나타난다. 초간정은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수려한 풍광을 이루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에 오르면 경치 좋은 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글을 읽던 선비의 삶이 부러워진다.

초간정을 나와 조금 더 차를 몰면 용문사 가는 길이다. 신라 천년 고찰이자 예천의 대표 사찰인 용문사는 일주문을 지나자 보광명전 앞 비탈에 조경이 한창이다. 고운 단청과 깔끔한 절 마당 5층 석탑을 미루어 보아 불사(佛事)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청아한 오색단청은 보는 이의 가슴까지 물을 들인다.

용문사는 여러 전각 중 특히 대장전과 그 곳에 있는 목각탱화와 윤장대는 유명하다. 목각탱화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대중들을 상'중'하 3열로 배치시켜 전체 구도의 단순성을 피했으며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에 쓰던 윤장대는 국내 유일의 경전용 책장으로 대장전 내부 좌우에 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깨달음의 과정을 그린 심우도(尋牛圖)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꿀을 탐하는 중생의 모습을 표현한 보광명전의 벽화는 불교적 세계관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행 Tip

예천 용문면 금당실 마을과 선동마을, 용문사 등을 찾아 나들이를 하려면 도시락을 필히 지참하고 가는 것이 좋다. 국도와 지방도로 변에 간간히 식당과 작은 음식점이 있기 하지만 전형적인 농촌풍경을 배경 삼아 야외에서 도시락을 먹는 멋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라 하겠다. 용문면 일대의 산과 계곡, 들판이 본격적인 계절의 수채화를 그리기에 앞서 수묵화로 밑그림을 그리고 있어 어디든 자리만 깔면 훌륭한 소풍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된장만 있다면 논둑과 밭둑에서 자라는 냉이와 쑥을 뜯어 씻기만 해도 한 끼 찬거리로 모자람이 없다.

◇예천 용문면 가는 길=중앙고속도로 예천 나들목을 나와 예천 방향 28번 국도를 타고 예천읍에 다다라 928번 지방도로 우회전한다. 이 때부터 용문사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곳곳에 병암정과 금당실마을, 선동마을, 초간정, 용문사 이정표가 나타난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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