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바지의 사회학

중년들에게 청바지는 젊은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이나 연령 가릴 것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입는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때 청바지는 젊음의 상징이요, 자유와 반항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청바지. 강산도 변할 시간을 몇 번을 거치는 동안 그의 모습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가하면, 길바닥에 예사로 질질 끌리고 다니기도, 멀쩡한 새옷이 중고 제품처럼 보이기 위해 모래로 갈아내는 모진 시련을 겪기도 했다. 청바지 변화의 역사를 들여다보자.

#청바지의 탄생

골드러시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대박을 노리고 서부로 몰려든 광부들이었들까? 아니다. 골드러시로 가장 큰 수익을 창출해 낸 사람은 바로 레비 스트라우스(Levi Strauss). 청바지를 만들고 세계 최고의 진 브랜드 '리바이스'를 창업한 주인공이다.

그가 처음부터 청바지를 생각해 낸 것은 아니었다. 천막과 포장마차용으로 사 들인 두꺼운 천이 팔리지 않자 질긴 옷을 원하던 광부들의 구미에 맞춰 작업용 바지로 용도전환을 꾀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박. 인디언 전통 물감(인디고)으로 푸른색 색도 입혔다. 청바지의 역사적인 탄생 순간이다. 이 때가 1860년 무렵이다.

그 이후 수십년 동안 데님은 작업복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1950년대 이후 일상복으로 자리매김 했다. 여기에는 1960, 70년대 히피나 펑크족들의 기여가 컸다. 이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튼튼한 재질감과 재생, 순환의 이미지를 가진 청바지를 택한 것이다.

그래도 '거리 태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청바지가 패션쇼장의 런웨이(run way'무대)로 올라서는데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처음 청바지가 패션쇼장에 모습을 들러낸 것은 1980년대 샤넬의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가 고급 트위드 정장과 짝을 맞춰 무대에 선보이면서부터였다.

이후로 청바지는 새생명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천박한'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했다. 90년대 이후에는 할리우드 스타들과 진은 떼놓을 수 없는 불과분의 관계. 50~8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프리미엄 진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이들을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귀네스 팰트로가 입은 '블루컬트', 다니엘 헤니가 유행시킨 '허드슨진', 빅토리아 베컴이 디자인한 '락&리퍼블릭' 등이 고가에 팔리는 대표적인 프리미엄 청바지 브랜드다. '디젤', '엔진', '파라수코진'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브랜드. 청바지업계에 따르면 1조원으로 추정되는 국내 청바지시장 가운데 400억원이 비싼 값에 팔리는 프리미엄 청바지의 몫일 정도라고.

#우리나라 청바지의 역사

우리나라에 처음 청바지가 상륙한 것은 해방 직후 한국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군들이 군복이 아닌 사복차림일 때는 청바지를 주로 입었는데, 전쟁으로 고된 삶을 살아가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청바지는 멋과 실용성을 겸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

본격적으로 청바지가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지금의 중년 남녀라면 그 시절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 음악에 맞춰 생맥주 한잔을 들이켜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 이 때의 청바지는 독재적 유신정권에 대한 반항과 자유, 순수와 낭만에 대한 젊은이들의 욕구를 대변하는 코드였다.

1982년 중고생 교복자율화가 되면서 청바지는 교복을 대체할 가장 수수한 옷으로 간택됐다. 특히 1980년대 아이돌 스타 전영록, 마이클잭슨, 마돈나의 영향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종아리에 착 달라붙는 쫄쫄이 청바지가 유행했다.

1990년대부터 청바지는 시대의 유행과 패션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소위 '빗자루 청바지'라고 해서 거리를 쓸고 다닐 정도로 통이 넓고 질질 끌리는 청바지가 유행했던 시기. 찢어진 청바지도 이 시기에 유행했다. 어른들은 "왜 멀쩡한 청바지를 찢고 난리냐"며 도끼눈을 떴지만 젊은이들은 칼로 긋고, 사포로 닳아 헤어지게 만들었다. 무릎과 허벅지 라인 등 어느곳 하나 멀쩡한 곳 없이 온데 구멍을 뚫어댔지만 그 중 압권은 엉덩이 라인 바로 아래를 찢어놓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살짝 드러나는 속살로 뭇남정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성들이 길거리를 쏘다녔다.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힙합 붐이 일면서 패션에도 힙합풍이 휩쓸었다. 밑위가 길고 통이 넓어 몸통까지도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청바지를 입고,굵은 체인의 스테인레스 목걸이 하나를 걸치면 누구나가 힙합 전사로 변신이 가능했다.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것은 로라이즈 진이었다. 로라이즈 진을 유행시킨 것은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 지금이야 이혼과 삭발사건, 요양원 입소 등으로 망가진 이미지지만 2000년대 초반 그녀는 귀여운 팝의 요정이었고, 그녀가 입은 밑위가 짧아 골반에 걸쳐입는 로라이즈 진은 시대를 풍미했다.

여성들의 사회적 약진 덕분이었을까? 도도한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부츠컷(나팔바지와 유사하게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지 통이 넓어지는 디자인)이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또 하나의 문화는 구제 열풍. 원래는 외국에서 입다 버린 중고 청바지를 값싸게 들여와 판매한 것이 그 시초였지만 그 스타일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늘어나면서 청바지 회사들은 아예 워싱이나 가공을 통하여 구제의 느낌이 나는 빈티지 청바지를 만들어 냈다.

# 진화하는 청바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청바지도 진화한다. 최신 IT 기기를 장착한 청바지, 첨단 소재의 기능성 청바지, 시대적 고민을 담은 그린 청바지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가을, 리바이스에서는 청바지에 MP3를 장착한 청바지 '레드와이어'를 선보였다. 애플사의 아이팟과 청바지와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청바지 앞쪽 작은 포켓에 넣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조이스틱을 사용해 사이드 포켓에 있는 아이팟을 꺼내지 않고도 손쉽게 아이팟을 조작할 수 있도록 했으며, 청바지 벨트에 거는 전용이어폰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선을 감아주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앞으로는 공상영화에서나 보여지던 각종 첨단장치들이 부착된 청바지가 속속 등장하지 않을까?

첨단 소재인 '쿨맥스'(Cool Max)도 청바지와 만났다. 더 이상 운동복의 소재만은 아니니 것이다. 땀의 증발을 빠르게 해서 착용감을 높인 쿨진. 청바지의 단점을 해소해 줄 아이디어 상품이다.

21세기 지구의 가장 큰 고민은 환경문제. 얼마전 뉴스에서는 2080년까지 지구의 기온이 3℃ 이상 상승하면 90%의 생물이 멸종할 것이란 무서운 경고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그린 패션이 등장했다. 원섬유, 가공, 제조공정, 기업의 사회적 책임까지 고민하는 에코 청바지다. 리바이스 에코 오가닉진, 미국 진 브랜드 룸스테이트, 캘리포니아의 세르퐁텐느, 큐이치, 언디자인드, 델 포르트 데님 등 많은 브랜드들이 '그린 청바지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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