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그 녀석 목소리

주삼례. 녀석은 내가 담임했던 5학년 교실에서 만난 제자입니다. 늘 고무공처럼 톡톡 튀는 언행으로 내 생각의 울타리를 고무줄 놀이하듯 풀쩍풀쩍 넘나들며 교실 분위기를 흩트려놓는 꾸러기였지요. 가령 조회시간에 '군것질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늘어놓으면, '그런데 선생님, 아침을 먹지 못해 쉬는 시간에 교문 앞 문방구에서 호빵 하나 사먹는 것도 군것질에 들어갑니까?'라는 투의 리플을 꼭꼭 달았습니다. 도대체 나의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는 유일한 아이였습니다.

늘 정답 밖을 헤매는 녀석 때문에 곤경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포장지 디자인을 제재로 한 그 미술수업 공개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진땀이 납니다. 교실 뒤에서 학교의 전 선생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의 시작 부분에서 나는 교탁 안에 미리 숨겨 두었던 소도구를 꺼내들고 "자, 여기 똑같은 선물이 있는데 이것은 예쁜 포장지로 쌌고, 또 이것은 헌 신문지로 쌌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이 녀석이 벌떡 일어나 주저없이 헌 신문지로 싼 선물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내 의도는, 아이들은 응당 포장지로 싼 선물을 택한다고 할 것이고, 그 대답에 이어 "그렇지요, 오늘 미술시간에는 이처럼 예쁜 포장지를 직접 디자인해보는 공부를 해봅시다."라는 멘트로 이어 가려는 각본이었는데 처음부터 엄청 어긋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수업은 엉뚱한 방향으로 급회전을 했습니다. 수런대는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의 얼굴이 언뜻 눈에 들어오면서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그 절체절명의 난국을 헤쳐나갈 전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녀석을 향해 얼굴을 붉히며 따지듯이 왜 그걸 택하느냐고 되물었는데, 녀석의 대답이 가관이었습니다. 내용물이 같다면 폐휴지를 활용하여 자원을 아껴야 한다나요.

졸업 후에도 가끔 찾아오거나 전화로 들려주는 녀석의 목소리는 늘 내 의식의 골짜기에 묘한 메아리로 살아나 제 선생이었던 나를 일깨우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저 중학교에서도 반장이 되었지만 친구에게 양보했어요.' '저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래도 축하해 주실 거죠.' '은행에 취직했습니다. 20년 후에는 이 은행 빌딩 높이만큼 키가 클겁니다.' '돈 세는 일로 내 세월을 죽이기가 너무 억울해 은행 때려치우고 캐나다로 떠납니다.' 쥐꼬리만한 퇴직금 챙겨 들고 혈혈단신 바다를 건너 간 녀석이 3년 만에 국제전화로 들려준 목소리는 더욱 씩씩했습니다. "선생님, 저 로스쿨에 합격했어요."

언제나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며, 람보처럼 괄호 밖의 넓은 세상을 단독으로 헤매는 녀석. 기짱 주삼례, 파이팅!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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