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들어 점차 오지로 들어가
청송에서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 무렵. 청송은 경상도의 벽촌으로 교통이 불편하고 기물을 공급할 마땅한 시장도 없었지만, 백자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고 풍부한 땔감과 맑은 물이 있어 사기굴을 박을 수 있었다.
16세기 후반 청송군 부동면 나리 좌지동 마을 개울가 옆에서도 처음 가마를 박고 그릇을 굽기 시작했다. 처음 만든 청송백자는 백자라기보다 짙은 회색에 가까웠으며 굽다리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조잡한 대접이나 접시가 대부분이었다.
당시는 청송 백자도 다른 곳의 백자와 다름없이 그릇이 두꺼웠으며 안쪽 바닥은 둥글게 원각을 지었고 가마에서 구울 때는 '비짐눈 받침'(그릇을 포개어 구울 때 서로 붙지 않도록 괴는 고화도의 콩알 모양 흙뭉치)을 깔기도 했다.
교통이 불편했던 조선시대 모든 가마가 그러했듯, 고령토만큼 중요한 것이 땔나무 조달이었다. 때문에 나리 좌지동에서 시작된 청송백자는 16세기 동안 나리 안나곡·내룡리 등으로 5~10년 사이를 두고 이동했다. 17세기 들면서 가마는 오지로 들어가는데 부동면 화장리·내룡리·신점리, 청송읍 금곡리 등 12개소를 옮겨 다니며 가마를 박았다.
이 시기에 들어서도 초기에 구운 대접이나 접시류는 짙은 회색이나 회청색을 띠었으며 바닥은 굵은 모래받침 흔적이 남아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종지나 제기(祭器)들이 만들어지고 그릇 표면이 유청색이나 유백색으로 변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생산된 그릇들은 다른 지역 민요(民窯)에서 생산된 것과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인다.
◆ 유백색-설백색 띠며 형태 점차 안정
18, 19세기 박은 것으로 보이는 가마가 화장리·신정리·양숙리·중기리·신점리 등지에서 8곳이 발견되었는데, 제작방식에 있어서는 17세기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때부터 법수광산의 도석을 이용한 백자 제작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자 제작의 기술도 진일보, 소품 위주의 기물 생산에서 다소 큰 호리병·푼주(아가리가 넓고 밑이 좁은 사기그릇) 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기물의 색상 면에서도 청송백자만의 독특한 색감인 설백색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19세기 동안 서서히 기물의 형태와 색상 및 제작기술면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청송백자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나름의 틀을 갖추고 완성된 전형(典型)을 보이게 된다. 이현리·화장리·내룡리·신점리·이전리·항리 그리고 영덕 봉산리 산성가마터 등지에서 생산된 백자는 완전한 유백색과 설백색을 띠며 그릇의 형태도 굽다리가 낮아져 안정된 모양을 보인다.
특히 이 시기부터는 가마 안에서 그릇을 구울 때 모래나 비짐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서로 맞포개는 기법을 터득했으며 기물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기벽도 극도로 얇아지게 되었다. 청송백자의 제작기법은 전래 옹기 제작기법과 그 맥을 같이 하면서도 말기에는 사기장들의 물레질이 조선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廣州) 분원(分院)의 기술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더구나 청송가마는 지방 민요이면서도 가족 단위의 운영이 아닌 기술자들로 구성된 철저한 분업화에 의한 제작공정 탓에 장인(匠人)들의 숙련도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뛰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청송백자는 지금까지 조사된 48곳의 가마터에서 16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 원료 부족하고 수요 줄어 사양길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든 지방 가마들이 '왜사기'의 대량생산 공세에 지리멸렬하지만 청송사기는 영천·포항·울진·영양 등지의 경북 동·북부 지역을 상권으로 왕성한 생산 활동을 했다. 그러나 6·25 전쟁에 휩쓸리면서 오지산골에 있던 가마들이 대부분 원료공급 및 인력 부족에다 빨치산의 등쌀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전쟁 후에도 얼마간 한두 곳 가마가 불을 지폈지만 전란으로 폐허가 된 통에 판매가 신통할리 만무했다. 당시 사기 가마 운영체계는 물주로 불리는 점주(店主)가 밑천을 대고 사기대장이나 기술자가 합류해 굽는 가마마다 수익을 나누고 잡부는 매일 품값을 쳐주는 형태였다.
청송백자도 점주들이 거금을 들여 그릇을 구웠지만 사러오는 사람이 없자 큰 손해를 입고 가마운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청송백자는 1958년 '법수공방'에서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핀 것을 끝으로 그 혈통이 끊기게 되었다.
1958년 법수공방에서 마지막 사기대장(도자기 제작 전 과정을 맡아 진행하는 기술자 우두머리)으로 일했던 고경만(77·대구시 북구 대현2동) 씨는 "당시 물주의 사정이 여의치 않고 인부도 구하기 쉽지 않아 도토(陶土) 준비가 안 돼 일이 없을 때가 많았다."며 "문을 닫기 직전 2, 3개월은 식기류는 만들어 놓아도 전혀 팔리지가 않았다."고 회고했다.
병과 단지 등 잡사기만 주문을 받아 만드는 실정이었는데, 늘 오던 등짐장수마저 발길을 뚝 끊고 말아 가마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자동화 된 왜사기나 양은·스테인리스 식기들이 시골장터까지 파고들자 도석을 빻아 만드는 청송백자는 더 이상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 골동품상에서 만난 청송백자
그 후 50여 년 세월, 청송백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으며 오늘날 골동품상의 한쪽 구석자리에 먼지를 쓰고 앉아 있는 처지가 되었다. 경북지역에서 생산되었지만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청송백자.
대구 이천동 골동품 골목에 가면 대접, 접시, 사발, 종지 등 작은 그릇과 함께 기름병이나 주병도 간간이 만날 수 있다. 더러는 희누르스름하고 눈과 같은 흰색에 깨알 같은 반점이 앉은 것도 있다. 문양이 없는 무지(無地)백자가 대부분이지만, 청화(靑華)로 단순한 풀잎 문양 한두 닢 그려둔 것도 보인다.
집어 들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무게감이 없어 순간 당황하기 마련이다. 유약은 얇게 발라져 있고 그릇 두께는 마분지처럼 얇다. 언뜻 보기에도 표면이 푸석해 보이고 두드리면 '퍽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난다. 사발이나 접시는 옛날 백자들에서 흔히 보이는 바닥 굽다리에 모래가 엉겨 붙어있지 않고, 입둘레도 특이하게 유약이 묻어 있지 않다.
주병이나 기름병은 몸통과 목 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 많다. 이천동의 한 골동품상은 "남들이 청송백자라고 하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있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민예품점 주인은 "청송백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흔했어요. 깨끗한 호리병 같은 것도 20만~30만 원 주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는 그것도 잘 보이지 않아요."라고 귀띔했다.
박상길(64) 한국고미술협회 대구·경북지회장은 "모양이 참하고 가지런한 것은 찾는 사람들이 있더니 그 나머지는 구석자리 신세가 된 지 오래다."며 "우리 고장에서 생산된 것이 푸대접받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전충진 김경돈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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