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이우걸 作 '링'

이우걸

와지마 고이찌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를 무너뜨린

유제두도

마찬가지다

시간은 지난 영웅을

까맣게 지워버린다

그러나 도처에

사각의 링이 있다

쉴새없이 손을 내밀어

자신을 지키거나

의외의 정타를 맞고

쓰러지는 경우뿐인,

오늘 또 연습 없이 링 위에 올라야 한다

나를 옥죄어 오는 피치 못할 옵션 때문에,

생애의 스파링이란

가파르기 검과 같다.

강렬한 생존인식이 긴장의 끈을 바투 죄는군요. 전편이 하나의 알레고리이자 삶의 무모성에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지난 시절 한·일 두 나라의 자존을 대변하던 권투 영웅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찌. 그들을 전면에 등장시킨 것은 링의 실재성을 환기하기 위한 시적 전략일 테지요.

링은 누구나 한번 오른 이상 승부를 낼 수밖에 없는, 오직 이긴 자에게만 유효한 '얼음의 공간'입니다. 그런 링이 도처에 널려 있고, 한눈을 파는 순간 여지없이 주먹이 날아옵니다. 생존을 위해 쉴 새 없이 내미는 주먹과 주먹들이 허공에 가득합니다.

생애의 스파링은 한순간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연습 없이도 매일같이 링에 올라야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삶의 조건이요, 피치 못할 옵션입니다. 세상은 아무래도 인간의 것이면서 인간의 것이 아닌가 봅니다. 초점이 잘 맞는 시의 행간에서는 흔히 이렇듯 '의외의 정타'가 독자의 이마를 향해 날아옵니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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