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가 쓴 '나의 아버지'] 옹고집 아버지와 화해

아버지는 내게 늘 일정한 거리감을 지닌 존재이다. 그것은 나의 기억이 미치는 어릴 적부터 그러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정말 엄격했다. 아니 옹고집이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가 맏아들인 내게 요구하던 것을 딱 하나. 공부였다. 당신이 어렵게 공부를 했으나 고시에 실패했던 터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맏이를 통해 꼭 꿈을 이뤄보겠다는 소망(?)이 스스로를 엄격한 아버지로 자식을 대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도 훨씬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고등학교 때만 해도 당시 아버지의 엄격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부자(父子)간의 갈등은 갈수록 골이 깊어 갔으며 삐딱선을 탄 맏이와 아버지의 간극을 메우려는 어머니의 고충은 날로 심해가기도 했다.

일례로 나는 '스파르타(Sparta)식 훈련'이란 말은 당신의 입을 통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들어온 터였다.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 정도로 알았다.

학창시절 일체의 잡기도 용납 되지 않았다. 중1때 동네아이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고 배우고 싶어 용돈을 모아 바둑판과 알을 산 적이 있다. 일요일 아침 동생을 꼬셔 바둑을 두다가 그날로 쫓겨났다. 저녁 무렵 들어온 집 마당엔 쪼개진 바둑판과 흩어진 바둑알을 어머니기 치우고 계셨다. 이 때문에 나는 바둑과의 인연을 영원히 접는 계기가 됐다.

중2때였던가. 학교성적이 한 번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래도 전교 상위권이었는데. 아버지는 통지표 도장을 찍다가 벌떡 일어서시더니만 책가방을 마당으로 휙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따위로 공부하려면 구두나 딲어."

친구 집에 가서 사나흘을 버티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지만 고교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도 아버지의 옹고집은 여간해서 꺾이지 않았다.

대학교 3년 여름방학 때 학과 여학생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혼쭐이 난 일이며 선배들과 술에 취에 집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새벽에 쫓겨 난 일 등은 지금도 그들을 만나면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한번은 영문교재를 사기위해 두 번 돈을 타내려다가 미리 책 제목을 적어 놓은 아버지에게 들켜 친구의 책을 빌려 복사방 신세를 진 일은 차라리 애교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지난 일요일 아버지와 집안 종중모임에 함께 갔다. 두 손녀와 함께.

아버지는 손녀들에게 집안 어른들과 윗대 조상의 업적을 설명하기에 바빠 보였다. 아직 거리감이 있는 나는 멀찍이 떨어져 딴전을 피웠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밑에서 비뚤게만 나갔던 그 아들이 이제는 두 딸의 아버지가 됐고 손녀의 재롱에 마냥 흥겨운 고집불통의 아버지와 진한 혈육의 정이 오월의 햇살아래 몽글몽글 솟아남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일흔의 아버지와 불혹을 훌쩍 넘긴 아들 사이에 살가운 말은 오가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넌지시 내미는 송편 한 조각에 지난 세월의 섭섭함은 잊혀져 버린다.

오랫동안 평행선을 그어온 부자관계에서 그 아들이 아버지가 돼고서야 천만분의 일이나마 아버지의 마음을 훔쳐 볼수 있어서 일까.

아버지와 아들, 그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혈육의 인연 앞에 손녀들의 재롱은 계속됐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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