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가슴에 커다란 못이 하나 박혔다. 그 아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그 굳게 박혀 있는 못 때문에 오히려 할머니는 어느 누구보다 강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2001년 1월 15일을 떠올리면 눈 앞이 흐려지고 목이 메여 말을 할 수가 없다. 대한 추위가 닥치던 그 날, 하늘에선 하염없이 눈이 퍼붓고 있었고 김천에서 함께 살던 막내 아들은 구미에 있는 직장에 간다며 경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게 살아있는 막내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뒤늦게 병원 영안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있는 아들을 보고 할머니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눈 쌓인 고갯길을 오르지 못한 아들의 차는 미끄러지듯 중앙선을 넘어버렸고,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대형차와 부딪혀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들은 효자였다. 그래서 할머니의 가슴에 더 큰 못으로 남았다.
정해연(65) 할머니는 대구 서구 내당동 주택가 전세집에서 김군수(11), 지수(9) 손주 둘과 살고 있다. 막내 아들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겨놓은 피붙이들. 김천에서 3대가 함께 살던 단란했던 시절이 그립지만 모진 삶을 이어가야 하기에 그저 추억에만 젖어있을 수는 없다. 막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몇 달 뒤, 며느리는 아이들과 함께 대구로 가겠다고 했다. 막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막내 아들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잘 살라"며 내보냈다. 그리고 두어해쯤 지났을 어느 날 새벽. 당시 6살이던 손자가 김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손자는 "엄마가 없어졌어요."라고 울먹였다. "곧 들어올테니 걱정말고 자라."고 밤새도록 달랬다. 그러나 며느리는 끝내 돌어오지 않았다. 힘들었으리라 이해는 하면서도 두 아이가 눈에 밟혀 어떻게 문을 나섰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막내 아들이 사고로 숨지기 일년 전,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막내 아들은 아버지를 낫게 해드리겠다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몇 해 전 결혼한 막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둘을 안겨주었다. 그런 손주들의 재롱도 잠시, 할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됐고 아들은 세상을 떠났으며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게다가 아이들의 고모이자 할머니의 둘째인 딸은 정신지체 2급 장애를 갖고 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딸을 김천 큰 아들 집에 맡겨두고 할머니는 거동조차 못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대구로 왔다. "고아원에 보내야하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말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죽고 없으면 몰라도 고아원은 절대 안된다."
지난 5월 4일, 학교 운동회를 빠지고 할머니는 손주들과 김천엘 갔다. 추풍령에 있는 막내 아들 산소를 찾아갔다. 5월 5일은 막내의 생일이다. 할머니는 5월만 되면 가슴이 무너진다. 선물 하나 건네줄 부모가 없는 어린이날이자 가슴에 묻은 막내의 생일, 그리고 카네이션 한 송이 달 수 없는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손주들은 가끔 가위에 눌리는지 꺼억꺼억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지르다 잠에서 깨곤 한다. 그렇게 깬 손주들은 무심코 엄마를 부르고, 그 소리에 할머니 가슴은 다시 한번 무너진다. 한달 생활비 40여만 원. 영어, 피아노는 먼나라 이야기다. 하지만 아이들은 기죽지 않는다. 학교에서 돌아와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복지관 공부방으로 내닫는다. 교통사고 유자녀 지원금으로 마련한 전세방도 그저 고맙지만 아이들 씻길 목욕탕 하나 없어 안타깝다. "한번은 물을 데워서 밖에서 목욕을 시키는데 아이들은 춥다고 오들오들 떨고, 목욕탕 보낼 돈은 없고…. 그렇다고 부모없는 아이 티를 낼 수도 없잖아요?"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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