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구광본 作 '식구'

늦은 밤에 모여 앉았습니다

수박이 하나 놓여 있고요

어둠 속에서 뒤척이는 잎사귀,

잠 못 드는 우리 영혼입니다

발갛게 익은 속살을 베어 물 때마다

흰 이빨이 무거워지는 여름밤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할까요

넓고 둥근 잎사귀들이 퍼져나가

다시 뿌리의 상처를 어루만질 때까지는요

오랜 헤어짐을 위하여

둥글게 모여 앉은 이 자들이

아버지, 바로 당신의 식구들입니다

수박이 없다면 여름밤은 얼마나 심심할까. 어릴 적 방학 책에도 수박 그림이 빠진 적이 없었지. 수박은 혼자 먹기 위해 사지 않는다. 가족 단위로 모여 앉아 먹어야 하는 과일이 수박이다. 여름 저녁 퇴근길 아버지가 들고 오시던 수박, 한 가정의 단란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데 벌건 속살을 베어 물 때마다 흰 이빨이 무거워진다고? 어떤 장면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말 한마디 없이 둘러앉아 수박의 속살만 파먹고 있는 식구들. 식구라는 이름으로 모이긴 모였는데 제 상처 들여다보기에 급급하다.

기실 평생 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기억의 상처는 대개 식구들로부터 온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넓고 둥근 잎사귀처럼 널리 퍼져나간 자식들, '뿌리의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하리. 아무리 덩굴 뻗어 온 밭을 뒤덮어도 끝내 돌아갈 곳은 뿌리이기 때문에.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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