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전방에서 군복무를 할 때 겨울에는 보초병들에게 방한 마스크가 지급되었다. 얼룩형인 방한 마스크로 눈과 코 일부를 제외하고,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었다. 눈물이 날만큼 추운 엄동에 보초병은 이 방한 마스크로 얼굴의 동상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동네 산책길에서 색깔은 연하지만 방한 마스크처럼 보이는 이상한 마스크를 쓴 아주머니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겨울도 아닌데 왜 저런 마스크로 중무장을 했는지 궁금했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요즈음 유행하는 자외선 차단용 마스크라고 한다.
이제 시내 거리와 산책길, 시외 산등성이 등 곳곳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 마스크를 쓴 아주머니들을 볼 수 있다. 가끔씩 새벽이나 저녁 무렵 어두울 때에는 마스크 쓴 사람들 때문에 흠칫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저 마스크를 쓰면 구별하기 힘들어지고, 범죄에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중년 남자분이 이 마스크를 쓰고 산책하는 광경을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피부미용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사회이다.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는 마스크 이외 가면과 탈이 있다. 중세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니발 축제는 가면의 착용을 허용하는 며칠 동안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가면착용을 엄격하게 금지하다가 이 축제를 할 때에는 허용하였다.
시민들은 가면을 쓰고, 신분과 성별, 사회계급을 떠나 모두 평등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신분제 사회인 중세시대에서 이 가면은 짧은 시간이지만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중요한 도구였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의 등쌀에 힘겨웠던 서민들은 가끔씩 자신을 숨기는 탈을 쓰고, 양반들의 허위와 가식을 조롱하면서 자신들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냈고, 양반들도 모른 척 눈을 감아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신분제로 꽉 막힌 사회에서 하층민들은 가면과 탈을 통해 고단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들에서 일하실 때 뙤약볕을 막기 위해 머리 위에 큰 수건을 얹어 늘어뜨리고, 그 위에 갓이 큰 모자를 겹쳐 썼다. 피부미용보다는 피부가 검게 타서 벗겨지는 피부손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어린 시절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필자는 짧은 시간 동안 햇볕에 노출되는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자외선 차단용 마스크까지 사용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그렇다고 무조건 마스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소박하고, 기본적인 욕망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나의 행동은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한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람이 얼굴을 가릴 때에는 신중해야 하고, 가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특히 공공장소에서는 얼굴을 가리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얼굴이라는 소통의 문을 통하여 갖가지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느낌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는다.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는 것보다 서로 만나는 것이 더 반가운 것은 바로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사람과 소통하는 문을 닫는 것이고, 소통의 문을 닫으면 '함께'라는 소중한 가치가 가려지게 된다.
도시에서 아파트 문화, 인터넷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은 이웃에 무관심해지고, 서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형식적인 인사마저 꺼려할 때가 많아지고 있다. 젊은 학생들은 사람과 마주보는 공간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임공간, 인터넷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익명의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무책임해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얼굴마저 가리면서 마음의 벽을 더 두껍게 쌓을 필요가 있을까? 자주 봐야 정이 난다고 한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얼굴을 보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서로 마주보며 가볍게 눈인사라도 하는 정겨운 산책길을 상상해 본다.
남호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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