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이해할 수 없는 심리

이해할 수 없는 심리가 있다. 어쩌면 이런 일반화가 폭력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롤리타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있다. 조금은 천박한 용어로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이렇다.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병적 상태"라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이 용어는, 하지만 '롤리타' 이전의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해왔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들에 대한 성적 농담이나 성적 학대도 이와 관련된 바가 많다.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에 등장하는 '원조교제' 이야기도 여기서 그다지 멀지는 않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을 맡은 두 영화 '롤리타'와 '데미지'는 젊은 여자에 대한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를 향한 작품이다. 애드리언 라인 감독이 연출한 '롤리타'는 중년 남성이 소녀의 발칙한 유혹에 이끌리는 데 주목하고 있다. 소녀는 무방비상태의 순진함을 무기로 활용한다. 이미 그녀는 순진한 소녀라기 보다 순결성을 유혹의 도구로 삼을만큼 교활하다.

아무렇지 않은 행위 하나하나에 양아버지가 숨죽이는 것을 안 소녀는 의도적으로 방심을 연출한다. 삐뚤삐뚤 입술을 칠한 채 덜 여읜 종아리를 흔들기도 하고 아무 곳에나 속옷을 드러내며 풀석 주저앉기도 한다. 험버트는 그녀의 이런 행동에 마음이 베이듯 아프게 바라볼 뿐이다. 험버트의 욕망은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그리움과 닮아 있다. 어린아이들이 잔인한 까닭은 바로 그 시절을 되돌이킬 수 없음을 어른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젊음을 목도하듯 그렇게 험버트는 롤리타를 바라본다. 그것은 가질 수 없다기 보다 결코 되돌이킬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기에 더 안타까운 감정으로 자리잡는다.

'데미지'의 시아버지는 좀 다르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상징적으로도 그렇고 가계 안에서도 그는 아버지다운 아버지로 군림한다. 그를 수식하는 '아버지'라는 용어는 그의 정체성이면서 또 한편 권력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며느리와 사랑에 빠진다. 아니 여기엔 사랑이라는 말이 부적합하다. 그는 그녀의 육체성에 매료되어 자신이 공들여 쌓아두었던 체계를 무너뜨리고 만다. 자신이 만들어 두었던 공간에 스스로 흠집을 내는 순간 우리가 질서라고 불렀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만다. 욕망을 가둠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던 모든 체제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여성의 성적 욕망이나 사랑에 대한 갈구가 서정적 묘사로 진행된다면 대개 남성의 욕망이나 사랑은 이야기를 지닌 서사적 파국으로 연출되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만큼이나 남성의 욕망이 권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누구나 젊음을 그리고 일탈을 꿈꾼다. 하지만 소녀에 대한 집착이나 아들의 연인에 대한 갈망은 욕망으로 부르기조차 남루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갈망들이 현실 공간 속에서도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무너지고 단죄받는다. 불행히도 현실 속에서 이런 욕망들은 젊음을 방기하는 소녀들의 무지와 결부돼 범죄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때론 현실이 영화보다 더 독하고 모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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