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박권숙 作 '칸나를 위하여'

칸나를 위하여

박권숙

시해된 왕후의 시신을 태운 불은

칠월의 폭염 아래 석고대죄를 하고 있다

스스로 화염을 지펴 진홍으로 타는 꽃.

소진의 마지막은 늘 무섭고 아름답다

빙그레 손을 털고 빈손으로 돌아가

태초의 깨끗한 알로 긴 열반에 드는 꽃.

시인 특유의, 번득이는 감성이 살아 있습니다. 칸나를 '시해된 왕후의 시신을 태운 불'에 비유한 이미지를 보세요. 섬뜩하지 않습니까? 활짝 핀 꽃과 타는 불꽃의 관계는 그리 신선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칸나에서 '왕후의', 그것도 '시해된 왕후의 시신'을 떠올리는 것은 놀라운 상상력이지요.

꽃의 절정은 늘 소진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순간. 스스로 화염을 지펴 진홍으로 타들어 갈 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벽한 소진일수록 불길은 더 강렬한 법입니다.

'태초의 깨끗한 알로 긴 열반에 드는 꽃.' - 이 마지막 구절은 자연의 영원성에 던지는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손을 털고 스러져 가지만 태초의 알 속에 때묻지 않은 환생의 의미를 묻어두려는 게지요.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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