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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옥입니다] 줄이고,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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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한가로이 시골길을 걸었다. 여름장마가 끝난 후 9월 한 달 내내 가을장맛비가 줄창 내렸음에도 논배미마다 고개 숙인 벼이삭들로 넘실거렸다. 논두렁·밭두렁의 콩포기들은 도톰한 꼬투리들을 무겁도록 달고 있고, 지붕과 돌담 위로 늘어진 박 줄기마다 큼지막한 박들이 아슬아슬 그네타듯 매달려 있다. 많은 비와 흐린 하늘, 태부족한 일조량 등으로 생장 환경이 퍽 좋지 않았을 터인데도 여느 해처럼 풍성한 결실을 맺고 있었다.

릴케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남국의 햇살처럼 목덜미 따끈거리게 하는 가을 들판에서 수걱수걱 제 할 일 다 해내는 그것들이 대견해 보였다. 나쁜 짓 다 해놓고도 사회가 어떻니, 세상이 어쩌고저쩌고 남 탓이나 하는 우리 인간들이야말로 얼마나 치사한가.

한 지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한참 뒤에야 들었다.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었다. 지난해 늦가을 어느 자리에서 잠시 마주친 뒤 한 번 만나야지, 마음만 먹다 못 만났더랬는데…. 지적이고 곱던 그이의 갑작스런 소멸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끔씩 적조했던 지인들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난다. 연민의 정이 가슴을 싸아하게 만든다. 노인들이 친구가 한 명씩 떠나갈 때마다 몸져눕게 된다는 게 비로소 이해된다. 기실 죽음이란 것은 얼마나 우리 가까이 있는가. 저 멀리 산 너머 또 산 너머 아스라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날마다의 일상 속에서 얼찐거리고 있음을…. 그럼에도 우리는 유난히도 죽음에 관한 한 치매수준의 건망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큼은 영원히 살 것 같은…. 바다를 찾아간 4명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어느 70대 어부의 미친 욕망도 그런 못 말릴 착각 때문은 아니었을까.

'菜根譚(채근담)'에는 '인간의 삶에서 한 푼(一分)을 줄이면 문득 한 푼이 초탈된다(人生減省一分)'고 했다. 이를테면 사람간의 번잡한 交遊(교유)를 줄이면 시끄러움을 면하고, 불필요한 말을 줄이면 허물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나날이 줄이는 걸 구하지 않고 나날이 더함을 구하는 자는 참으로 生(생)을 속박하는 것이다'(彼不求日減而求日增者/ 眞桎梏此生哉)라고도 했다. 울룩불룩 덩이지는 욕심들을 줄이는 것은 참 어렵다. 그래도 줄이려, 비우려, 애쓰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린다.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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