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씨는 감사원장'국무총리를 역임하고 신한국당 총선 선대위원장에 영입되면서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주자로 부상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군웅할거라 할 만큼 주자가 넘쳤다. 이는 YS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하는 등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문민정치의 기틀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8~9명이나 되는 주자 중 선거전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여론조사 1위는 박찬종 씨였다. '대쪽' 이미지의 이회창 씨는 그것이 곧 장점이자 현실정치에서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했다. 수많은 당내 주자 가운데서 이회창 씨가 명실상부한 선두 주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킹메이커로 불리던 김윤환 씨의 거중 조정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회창 씨는 경선에서 이인제 씨를 누르고 막강 여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그는 DJ를 앞세운 야당의 전면적인 공격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병풍 공세 앞에서 이회창 씨는 무기력했다. 대응전략 부재, 정치력 부족을 드러내면서 지지율은 급락, 10% 아래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후보 교체론이 나온 것은 자연스런 일인지 모른다. 반보수 정권의 탄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상황이었다. 경선 차점자인 이인제 씨가 대안으로 회자됐고 YS의 불투명한 대응이 이를 부채질했다. 본선 결과 이인제 씨의 부산'경남 득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배경이 됐다.
이회창 씨는 패했다. 막판 민주당과의 합당으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DJ에게 정권교체의 영광을 안겨줬다. 뿐만 아니라 이회창 씨는 좌파정권의 단초를 열어줬다. 그러나 이회창 씨는 이런 중대 실책에 대해 전혀 문책받지 않았다. 국가의 진운을 뒤틀어지게 한 무능과 부실을 비난받기는커녕 이상하게도 동정의 대상이 됐다. 이인제 씨가 지탄받았을 뿐이다.
덕분에 이회창 씨는 16대 대선에 다시 나섰다. DJ정권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이회창 씨는 다시 패했다. 경선 불복 출마자가 없었음에도, 노무현이라는 경량급 후보와 맞상대했는데도 진 것이다. 이번에도 정치공학자와 언론은 그의 무능과 부적격을 질책하지 않았다. 상대의 네거티브 공세만 탓했다. 좌파 지배 10년을 헌상한 무능과 과오를 눈감아 준 탓에 이회창 씨의 대권 3수 소동이 빚어지고 있다.
김재열 논설위원 solan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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