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배창환 作 '우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자

배창환

겨우내 우리 아이들이 졸업한 초등학교가 없어졌다. 폐교된 지 이태 만에 불도저로 밀고 덤프트럭이 와서 학교를 실어갔다. 운동장엔 아직 민들레 한 포기도 비치지 않는 너무 이른 봄, 아이들은 벌써 이웃 학교로 떠난 지 오래, 홀로 쓸쓸히 낡아가던 교문도, 교문 오르는 비탈길에 학교보다 백 년은 더 된 느티고목도 싹둑 베어지고 없다. 운동장엔 즐비하던 플라타너스, 일찍이 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커서 아이를 낳아 이 학교에 보내고, 운동회 날 선생님 대접한다고 돼지 잡고 국 끓여 대낮부터 막걸리 콸콸 따라 동네잔치하던 그 플라타너스 짙은 그늘도, 그때 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꽃동산도 화산이 불을 뿜던 지층 파노라마도 축구 골대도 둥근 시계탑도, 하얗게 빛나던 백엽상도 학교 교사(校舍) 앞에서 구름이나 산새들을 불러모으던 허리 굽은 적송 한 그루도, 아이들 깨금발로 오르내리며 놀던 돌계단도 밤낮으로 펄럭이던 태극기도 이젠 없다. 썰렁한 운동장엔 인근 숲에서 불어드는 드센 바람만 무성한데, 어린 플라타너스 잘린 몸뚱어리 몇 뒹굴고 있어 가만 들여다보니 수십 개의 둥근 별자리가 성성 박혀 있다. 나는 그 어린 등걸을 안고, 지나가는 바람이 듣지 못하도록 가만히 속삭였다

― 얘야, 여긴 너무 쓸쓸해서 안 되겠다

우리 집에 가자

불도저는 힘이 세다. 코뿔소처럼 힘이 세다. 코뿔소는 그러나 초식동물이다.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지 않는다. 그러나 불도저는 뭐든 닥치는 대로 먹는다. 흙이든 바위든 가리지 않는다. 길 가다가 옆구리를 파 먹힌 끔찍한 산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학교를 먹어치운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즐비하던 플라타너스와 백 년 먹은 느티, 축구 골대와 돌계단이 불도저의 희생자가 되었다.

불도저는 자본주의를 닮았다. 마을을 잡아먹고 동네잔치를 삼키고 인정을 말라붙게 만들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삶의 흐름을 끊어놓았다. 드센 바람 속에 애꿎은 어린 플라타너스만 몸통 잘렸으니―. 몹쓸 세월아, 우리 집에 가자. 가서 같이 부둥켜안고 실컷 울어나 보자.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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