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선후보 동행 취재] ②정동영 후보

"당선되면 청와대에서 안살겠다" 민심대통령 약속

전남 여수→도라산 역→대전→명동→서울역(27일), 인천 GM자동차→부평역→용현시장→경기도 안산→이천(28일). 27일 공식 선거운동 시작 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약 900km를 이동했다. 이틀간의 동행취재에서 마지막 동선인 안산→이천 구간에서는 정 후보와 기자가 나란히 그랜드 카니발(후보 차량)에 동승,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수는 나의 힘=27일 오전 10시, 한 시간 전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자들이 탄 기차는 어느새 도라산 역에 도착했다. 후보는 여수에서 비행기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10시 30분경 감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 차림의 정 후보가 역사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수엑스포 유치기원 행사에 참석하느라 밤을 꼬박새우고 상경하느라 피곤할텐데도 생기가 돌았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여수 엑스포 유치가 성공하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뜻대로 된 것 같다. 시작부터 조짐이 좋다."며 "여수에서 단단히 기(氣)를 받았다."고 기염을 토했다. 두 번의 도전 끝에 승전보를 올린 여수와 대권 재수에 도전한 자신이 흡사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 후보 차량에 동승해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끄떡없다. 유력 후보 중 가장 나이가 젊다. 물리적 나이도 그렇지만 사고(思考)의 나이는 더욱 그렇다. 에너지가 넘쳐 흐른다."고 힘있게 답했다.

"오늘 여론조사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고 재차 질문했다.(정 후보는 28일 저녁 SBS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2등을 했다.) "저 쪽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나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느냐가 문제다. 더욱 사랑하고 헌신하겠다."

◆영남권 전략='영남권에서 낮은 지지율을 어떻게 극복하겠느냐?'는 질문엔 한 동안 기자의 얼굴만 봤다. 28일을 수도권 공략의 날로 정했고, 일정도 거기에 맞춰져 있던 터라 영남권 질문이 다소 '쌩뚱 맞다'는 표정이었다. 30초간 어색한 침묵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가리키며)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해 안가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나? 그 인생은 어찌보면 무법자와 같다. 옆에 계신 법무부 장관에게 법리적 견해를 부탁한다."며 함께 있던 천정배 의원을 쳐다봤다. 천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 "선거법 위반 사실만 하더라도 위법을 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한 도피행각을 벌이는 등 또다른 범죄를 저질렀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법과 국가를 철저히 무시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후보는 이어 "그땐 몰랐지만 한나라당 경선 때 왜 그렇게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후보를 향해 극언을 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납세·국방·교육·근로, 어디 하나 안 걸리는게 있는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이같이 결정적 흠집이 있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전례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영남권 전략을 말해 달라."는 주문에 정 후보는 "탕탕평평 정책으로 대구·경북, 부산·경남에서도 인정 받는 사람이 되겠다."며 "이강철 청와대 정무 특보와 얼마전 통화해 도움을 구했다. 탈당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병준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에 대해서도 "이 시간 우리측 사람과 만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연설은 그만=대선의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정동영의 유세 스타일이 달라졌다. 정 후보는 높은 억양과 큰 목소리, 격정적인 제스쳐 등 선동적 연설 스타일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여러분, 사랑합니다.'로 시작한 대전과 수도권 유세는 끝나는 순간까지 부드러웠다.

28일 안산 유세에서 그는 연설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누구보다 연설은 자신 있지만, 이 자리에 여러분과 대화를 하기 위해 온 것이지 정치적 선동을 하러 온 게 아니다."면서 "남의 말을 잘 듣고 핵심을 뽑아내는 기자출신으로 국민의 요구를 누구보다 잘 파악 할 수 있는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연설 스타일을 변경한 이유를 물었더니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혹시 이명박 후보처럼 목 관리 차원 아닌가."라는 질문엔 "이 후보는 그런가. 그것도 못 믿겠다. 사회 각계가 토론회 참석을 요구했는데, 행사 시작 몇 시간을 앞두고 취소해 버리는 사람이다. 국민을 무시해도 유분수지"라며 또다시 이 후보를 공격했다.

◆서민대통령=27일 대전유세에서 그는 당선되면 청와대에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경호원들 잔뜩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출퇴근하면서 국민과 함께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들과 섞여 영화 보고, 시장도 가고 왜 장사가 안되고 왜 취직을 못하는지 직접 보고 듣겠다."

"정말 그럴거냐?"는 확인질문에 긴 답변이 돌아왔다. "궁(宮)에 있으면 민(民)을 제대로 살필수 없다. 우리 부모님은 9형제를 낳았다. 나는 원래 5남이었지만 지금 내 호적에는 4형제 중 장남으로 돼 있다. 부모님이 자식 다섯을 가슴에 묻은 것이다. 그런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행복하다."

◆민심은 '경제'=인천 GM 대우자동차 노동자 정현철(37) 씨는 "친구 중에 아직도 (고시) 공부하는 놈이 있다. 인천에 공장이 많아 실업율이 낮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체감 실업율은 전국 최고 수준일 것"이라며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정당, 인물에 상관 없이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도매상을 운영하는 김민규(44) 씨는 자신이 노사모(노무현 대통령 지지모임) 회원이라면서 "애들은 자꾸 커가고 돈 들어 갈 곳도 많아 경제 문제의 시급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따질 것은 한 번 따져봐야 하는 것 아니냐? 참여정부의 황태자였던 정 후보가 왜 그렇게 노 대통령을 비난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천 롯데백화점 유세장에서 만난 일일 커피좌판을 하는 모길분(67) 할머니는 "인물이 훤하네. TV보다 훨씬 잘 생겼어."라며 "늙은이들 추운날 고생하는 만큼만 벌게 해줘."라고 부탁했다.

도라산역 인근 주민인 50대의 김모 씨는 "인근에 땅을 좀 가지고 있으나 내 땅인지 국가 땅인지 모를 정도로 방치해 뒀다."며 "최근 군에서 지뢰를 제거하고 옆에 도로까지 생기는 등 확실히 최근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며 각 후보들이 국민들을 위해 귀 기울여 줄 것을 기대했다.

박상전기자 mikypark@msnet.co.kr

♠ 김밥·햄버거·토막잠 강행군…만취 노숙자 난입 소동도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유세 동행 첫 날인 27일 도라산 역으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캠프 대변인 관계자가 방송용 무선 마이크를 꺼내들고 외쳤다. "어제 이 거 분실하신 기자부~운". 앞에 있던 카메라기자 도우미가 자신의 동료 것이라고 하자 관계자의 표정이 무섭게 바뀌었다. "한 번만 더 후보님 주머니에 이런 것 넣다가 걸리면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전날 전남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 축하행사 때 혼란한 틈을 타 누군가 몰래 정 후보의 양복주머니에 넣어 '비밀 취재'를 시도한 것.

27일 대전 유세 때 유세차량 위에서 정 후보가 열변을 토하고 있던 즈음, 기자들은 봉변을 당했다. 술 취한 노숙자가 기자단 자리에 뛰어와 "야 이 XX들아. 정동영은 뭐고 신당은 또 뭐냐? 우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얼굴 들고 다녀?"라면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뱉어냈다. 경찰의 제지로 겨우 소동은 끝났다.

정 후보는 기자들 사이에서 '고개숙인 남자'로 불린다. 유세 단상에 올라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공부'에 열중하기 때문. 각종 토론·연설회 준비를 따로 할 시간이 없어 자신에게 눈길이 쏠리지 않는다 싶으면 여지 없이 주머니 속 자료를 꺼내 열심히 외운다. 토막잠도 고개숙인 남자를 만든다. 지난 27일부터 이틀간 취침 시간을 계산해 보니 7시간에 불과했다.

빡빡한 일정으로 식사는 김밥, 햄버거가 대부분. 그러나 일정이 좋으면 28일처럼 대우자동차공장 구내식당의 '짬밥'으로 호사(?)를 누릴 때도 있다. 그나마 카메라 때문에 편치 못하다. "차량으로 이동할 때가 가장 편하다."는 후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 후보는 각종 행사에 입장하기 전 귀빈실에 잠시 머문다. 귀빈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볼일' 때문이다. 하루 15시간을 차안이나 청중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화장실 갈 시간이 없다. 기자들조차 출입이 제한돼 있는 귀빈실은 '볼일'보기에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박상전기자 miky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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