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쯤 대입 수험생들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다. 대입 정시전형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고3 생활을 접고 대학생 딱지를 달기 위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재수생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남다른 고민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바라는 것과 부모가 원하는 것, 학교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혀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솔직히 '내가 뭘 원하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등 떠밀려 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혹자는 "대학이 다가 아니다"라고 한다. 마라톤 같은 인생에서 대학전공이 삶의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자신의 대학 전공과는 무관한 직업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전공과는 전혀 다른 직업
30대 직장인 김모씨. 그의 직업은 대구의 주한미군 부대 군무원이다. 그런데 그의 대학 전공은 화학. 그의 현재 직무는 화학과 별 상관이 없다. 화학은 그의 적성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화학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화학과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래서 대학 4년 내내 전공 때문에 고생했다. 첫 직장인 외국계 제약회사도 마찬가지였다. 5개월 동안 책만 봤지만 아는 것 없이 재미도 못 느끼고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우연히 들렀던 학과 게시판에서 미군부대 인사처 직원 모집공고를 보고는 바로 짐을 싸버렸다. 이때부터 자부심도 들고 만족도 높은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중간에 다른 부서로 옮기면서 급수도 올라갔다.
정화중(51)씨는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고시를 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졸업후 지역의 한 교육기업에 취직했다. 사무직을 거쳐 이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지난해 이 회사를 그만 뒀다. 자신에 대한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21년 넘게 다니면서 직원 9명이 1천여명으로 불어난 회사였다. 청춘을 바친 직장이었지만 좁은 곳에서 정체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씨는 현재 한 보험회사 재무설계사로 근무 중이다.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시작한 영업직이지만 대만족이다. 정씨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서 자성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의료전문 변호사인 임규옥(48)씨도 경력이 이채롭다. 대학에서 외교학을 전공한 뒤 법학대학원을 졸업했다. 2년 전에는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임씨는 "학창 시절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적성검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고 주변에서도 권했단다. 그러나 계열별로 모집한 대입에서 사회계열로 입학했다. 그리고 10개의 과 가운데 하나인 외교학과를 선택했다. 어떻게 살다 보니 어릴적 희망사항인 법조인이 된 후에는 변호사로서도 전공분야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의대에 진학했다. 임씨는 "나이 들어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하니 힘들었지만 잘한 것 같다"고 했다.
대구교육대 음악교육 심화과정의 이인수(62) 교수는 영남대 법학과 출신이다. 그런 그가 국악(대금)과의 인연을 맺은 것은 28세 때였다. 어느 절에서 한양대 국악과 편입 신문 광고 조각을 보고는 진로를 바꿨다. 맨손으로 늦게 시작한 대금 공부를 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30년 넘게 국악인으로서 살아오고 있다.
◆문화계 인사들 특히 많아
전공과 다른 길을 가는 경향은 문화예술계에서 특히 강하다. 무엇보다 이쪽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색안경 낀 시각 때문이다.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예술인들이 많이 겪는 상황이다. 화가 윤종주(38·여)씨의 경우도 그렇다. 미술은 어린 시절부터 윤씨의 취미였다. 주변에서 좋은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미술인의 꿈을 접었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공중보건학을 전공했다. 윤씨는 "당시에는 내 의지로 무언가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졸업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미술에 대한 미련과 갈증을 버릴 수 없었다. 퇴근후 미술학원에 다니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1995년 대학원에 입학해 정식으로 미술인의 길을 밟았다. 걷는 게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던 시절이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탓에 시련의 시기도 거쳤지만 미술에 대한 집념으로 이겨냈다. 윤씨는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은 그림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대구 수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황원구(45)씨도 비슷한 경우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던 황씨의 대학 전공은 전자공학이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황씨는 부모의 뜻이었던 의대 입학에 실패하자 전자공학과를 택했다. 그러나 전자공학 공부는 수학을 못 하는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다. 황씨는 대신 음악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졸업후 음대에 편입했다. 중간에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그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버텼다. 황씨는 "(학사) 5년이 지나니 '일단 졸업이나 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누그러지더라"고 했다. 중학교 3년까지 쳤던 피아노를 기반으로 작곡 레슨을 받으며 힘들게 공부했다. 취미였던 음악을 전공하니 어려워도 재미있기만 했다. 황씨는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더라도 정신적으로 만족한다"며 "지금은 부모님도 좋아하셔서 더 좋다"고 했다.
위 두 사람처럼 업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적성을 직업과 병행하는 사례도 많다. 극단 마카의 제작자인 공정욱씨는 치과를 운영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치과 의사인 박세호씨는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로 같은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도희씨도 있다. 공씨는 "예전에는 지역에 연극영화과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40대 후반 이상 연극인들은 대부분 대학 연극반 출신들이다. 전공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구파티마병원의 최상용 신경정신과 과장처럼 자신의 본업 이외에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인사들도 있다.
◆그들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명인들도 전공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73)씨는 서울대 법과대학 학사 출신이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란 시절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가야금 소리에 매료된 뒤 줄곧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황씨가 서울대 법대를 선택한 것은 "법학의 분명한 이론 체계가 좋았기 때문"이다. 원래 그의 꿈은 사업가였다니 이마저도 장래희망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황씨는 결국 대학 졸업후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음악 인생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명동극장 지배인, 다큐멘터리 영화사와 출판사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1974년 이화여대 교수직을 제의받은 후로는 줄곧 음악의 길을 걷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주를 계속하려면 프로 정신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첼리스트 장한나(27)씨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청중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음악을 좀 더 근원적·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차원에서다. 장씨의 어릴 때 꿈은 심장 전문의였단다. 약이나 칼이 아닌 음악으로서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음악가의 역할이란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 V3의 개발자 안철수씨나 한글타자기를 개발한 고 공병우 선생은 의사 출신이다.
자신의 전공 대신 연예인의 길을 택한 스타들도 있다. 김태희는 서울대 의류학과를 나왔다. 영화배우 이기우는 단국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탤런트 이상윤은 물리학과, 개그맨 곽현화는 수학과, 박지선은 교육학 전공이다.
◆적성과 진로, 쉽지 않은 고민
사실 한국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취업문이 좁아진 요즘 같아서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지난해 4월 서울대 교육연구소 임찬영 연구원의 '전공불일치 결정요인과 전공불일치가 근속과 임금 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문대 이상 학력 소지자 가운데 2005년 취업 중인 15세 이상 65세 미만 1천747명의 전공불일치율은 57.2%이다. 전공 분야 6개 계열 가운데 이과계열의 전공불일치율은 80.6%, 인문·예체능도 71.6%, 공학(제조·건설) 55.3%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대학 진학시 ▷지원하려는 학과의 공부 분야 ▷졸업 이후 선택 가능 직업 여부 등을 안 살피고 성적에 따라 결정하기 때문으로 본다. 당사자의 적성이나 흥미 등은 따져 보지도 않고 성적에 맞춰 법대나 의대를 선택하게 하는 부모들의 성화도 문제이다. 진로교육 수요는 커지고 있지만 시간·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학교에서 진로지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교육 전문가들은 '인생은 마라톤'이라며 '10년 뒤의 모습을 그려볼 것'을 주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잘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선택 ▷앞으로의 사회변화를 고려 ▷인생의 목표·인생관 설정 ▷인생 설계도 작성 등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인생설계에 대학진학과 전공을 맞추고 ▷교사나 전문상담가·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전공에 대한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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